2012년 11월 2일 금요일

[시나리오] 시월애

첫 키스를 기억하십니까첫 키스를 기억하십니까...
공간이 기억 속에서 솟아 올라옵니다.
어둠 속의 네온 빛 조그만 백열등 아래... 그녀의 집 앞.
그리고 시간이 기억 속에서 솟아 올라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이 몹시 불던 그 날....
시간과 공간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기억 속에 자리하는 정서의 다른 이름 일 뿐이다.
그것은 한 인간 속에서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이 영화는 고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독의 밑바닥에 갔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 영화는 환타지 멜로가 아니다.
두 남녀 속에 자리한 고독이,
시간과 공간이 엇갈려 있다할지라도,
당신의 가슴속에 하나의 진실로 다가온다면,
그렇다면...
이 영화는 리얼리즘이다.
- 이 현 승
 
 
 
 
 
" 그린의 평온함 속에서 언 듯 비춰지는 쓸쓸함... 그 조그만 빨강... "
 
 
時 越 愛 등장 인물
성현 - 나이 27세. 건축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의 조교로 일하고 있다. 이혼 후 미국으로 가서 연락이 없던 아버지로 인해 상처받고, 귀국 후
자신이 다녔던 학교의 교수로 온 아버지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끼며 마음을 닫고 지내는 다소 폐쇄적인 성격의 소유자. 은주를 통해 차츰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을 열게 된다.
은주 - 나이 27세. TV 만화의 단역이나 악역들의 목소리를 주로 맡는 성우. 하지만 언젠가는 착한 주인공의 목소리를 맡게 될 꿈을 꾸는
순수하고 착한 심성의 소유자. 2년 전 유학을 가서 소식이 없는 애인 지훈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지만 성현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서서히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재혁 - 성현의 유일한 단짝 친구. 같은 학교에서 같은 건축을 공부했으며 성현과는 달리 밝고 쾌활한 성격. 성현의 곁에서 튀지 않지만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게 그를 지켜 봐주는 존재.
정숙 - 은주의 친구. 포엠에서 은주와 같이 살았었다. 은주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은주와 많은 생활을 공유하며
그녀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존재.
한석진 교수 - 성현의 아버지. 50대 중·후반. 어릴 적 부인과 이혼하고 어린 성현을 남겨둔 채 미국으로 건너가 건축가로 명성을 쌓는다.
성현이 성인이 된 후 다니던 학교에 교수로 부임하지만 오랜 감정교류의 부재 탓에 성현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속으로 안타까워하는 부성애를
보여준다.
지훈 - 은주의 옛 애인. 30전후 . 은주와 사랑을 나누다가 유학을 간 후 은주와 연락을 끊고 지냈다. 유학에서 돌아와서 은주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도시적이고 샤프한 외모의 소유자.
콜라 - 아주 귀엽고 똘망똘망하게 생긴 까만 색 강아지. 성현과 은주의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유일한 존재.
혜기 - 은주의 7살박이 조카. 은주를 잘 따르는 깜찍하고 순수한 꼬마 숙녀.
복덕방아저씨 - 포엠을 중개 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 좋게 생기고 순박한 느낌의 50대 아저씨. 은주와 성현의 시공을 초월한 편지교환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단서를 제공해준다.
복덕방아줌마 - 30대 초·중반의 복덕방 아저씨의 부인.
그 외 다수
 
 
 
 
 
 
 
 
 
時 越 愛
# 1. EXT. POEM 앞 - 1999년 - DAY (3시경)時 越 愛
 
정면에 보이는 빨간 우편함, 그 뒤로 포커스가 아웃된 채로 독특한 형태의 집이 보인다.
화면 밖 멀리서 부릉거리는 용달소리가 들리고 있다.
운전기사(o.s) 눈 올 거 같아요! 빨리들 나와요!
정숙(o.s) 은주야!
부릉거리는 차 소리와 운전 기사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화면 밖에서 들리는 가운데,
잠시 후 현관문을 열고 여자(27세, 김은주)가 나온다.
<은주가 문을 나서면서 credit 시작된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손에는 책들을 잔뜩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나온다.
입에는 카드봉투를 물고 있다.
은주를 쫓아 나오는 까만 강아지 한 마리.
은주, 걸어 나오다가 문득 서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본다.
다시 정신이 드는 듯 우편함으로 걸어나오는 은주.
집 앞 우편함 앞에 서는 은주. 카드를 입에 문 채 어떻게 넣어야 할지 난감해 한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이 유난히도 상쾌하게 느껴진 은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음악이 깔리기 시작한다.
기분 좋은 표정의 은주. 옆에서 강아지도 폴짝폴짝 뛴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는 은주.
용달차의 클락션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얼른 손가락을 움직여 우편함 입구를 열고 입에 문 카드를 떨어뜨리는 은주.
입구에 툭 떨어지는 카드.
카메라, 우편함으로 조금씩 다가간다.
차안의 라디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DJ소리>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은 만큼 오프닝 곡을 빙크로스비의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로 준비했습니다.
다가오는 1999년 12월 25일! 날씨. 눈 펑펑. 아주 큰 눈이 예상된다고 하네요. 오랜만에 예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할 수 있겠어요.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에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죠. 누구나 한번쯤은 기대해 본...
Camera movement가 Cut 없이 계속 우편함으로 다가가면,
은주가 강아지를 품에 안고 Frame Out, 곧 이어 용달차 문을 쾅 닫는 소리 들린다.
은주(o.s) 아저씨... 메리 크리스마스!!!
곧 이어서 포엠 앞을 지나치는 용달차.
계속 전진하는 Camera movement,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서 우편함 속까지 들어간다.
카메라 프레임, 우편함 속의 카드 C.U. 후 멈춘다.
겉봉에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복된 새해 맞으세요' - 김은주>라고 적혀있다.
FADE OUT.
 
# 2. EXT. POEM 우편함 앞 - 1997년 - DAY (3시경)
어둠 속, 쾅쾅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화면이 서서히 밝아지면 우편함 속이다.
우편함에서 카메라가 서서히 빠져나와 집을 Full Shot으로 잡으면,
빨간 우편함의 그 집이다.
#1의 집과는 달리 완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모습.
성현이 집 앞에 "Poem"이라고 쓰인 현판을 박고 있다.
성현(27세),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고는 도구들을 챙겨 집으로 들어간다.
우편함 앞의 페인트 통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성현 뒤로 깨끗하게 칠해진 우편함이 남겨진다.
흐리고 부드러운 일광의 느낌이 점차 창백하게 변화하면서
집이 Green의 모노톤으로 서서히 변화하면 그 위로 Wine색 타이틀이 뜬다.
'時 / 越 / 愛'
 
# 3. INT. POEM 거실 - 1997년 - DAY (3시경)
성현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고급스러우면서 세련된, 그러나 간결한 디자인의 포엠 내부가 보인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가운데 아직 정리가 덜 되어서
이삿짐 박스가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다.
성현이 들어와 거실 사이를 가로지르자 짐들 사이로 먼지가 조금 피어오른다.
이제 막 꺼내서 연결한 듯한 오디오(Bose CD player)로 다가가
"Secret Garden"의 CD를 꺼내 음악을 튼다.
후~ 하고 잠시 벽에 기대앉아 있는 성현. "Secret Garden"의 음악이 고요하게 흐른다.
멍하니 있다가 다시 일어나 쌓여진 박스들을 뒤지며 무엇인가를 찾는 성현,
박스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낸다.
다시 박스들의 안쪽을 여기저기 뒤지며 병따개를 찾지만 보이지 않자,
주변에 널려 있는 연장을 하나 집어 든다.
푹! 소리와 함께....
C.U.되는 그린 색 병 속의 자줏빛 와인.
병 속으로 밀려들어온 병마개가 둥둥 떠 있다.
성현, 잠시 병 안을 바라보다가 병째로 와인을 마신다.
 
# 4. INT. 녹음실 - 1999년 - DAY (5시경)
물 마시는 투명한 물병의 클로즈업 너머 보이는 은주의 모습이 물결친다.
물병을 내려놓는 은주.
부쓰 안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만화영화를 녹음하고 있는 성우들이 있다.
양쪽에 주인공 역을 맡은 듯한 성우1과 2가 오래된 습관인 듯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더빙을 시작한다. 그 외의 성우들은 뒤에 앉아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모니터를 보고 있다.
나머지 한 개의 마이크에는 대여섯 명의 성우들이 몰려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긴장된 표정으로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 뒤에 서 있는 은주. 기웃거리며 뒤꿈치를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본다.
자신의 순서가 다가오자 마이크에 가까이 가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겨우 마이크 앞에 가는데 성공하지만 키 큰 사람이 맞춰놓은 듯 은주의 키에는
턱없이 높은 곳에 있다.
은주 도망쳐!
어렵게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지만 타이밍을 제대로 못 맞추는 은주.
PD (O.S.마이크 소리) 컷!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는 은주. 은주에게 눈총을 주는 다른 성우들. 죄송하다고 연거푸 인사를 하며 뒤로 물러나는 은주. 다른 사람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한다.
부쓰 바깥의 PD와 오퍼레이터의 시선이 곱지 앉다.
PD (마이크소리, 딱딱한 목소리로) 다시 가겠습니다.
PD가 싸인을 하자 다시 긴장하여 기압을 넣는 폼으로 폴짝 뛰어서,
은주 도망쳐!
# 5. EXT. 공사현장 - 1997년 - EVENING
해질 녘 푸른 느낌의 황량한 흙 길.
끝없이 펼쳐진 길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군데군데 보이고 저 멀리 상판 공사중인
서해대교가 서있다.
거대한 덤프트럭이 마후라의 뜨거운 열기를 분출하며 지나간 뒤로 성현의 모습이 보인다.
측량작업을 하는 성현.
작업이 끝난 듯 인부들이 안전모를 벗고 사무실 쪽으로 들어간다.
인부들이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며 한마디씩 던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인부1 (성현을 보며) 안 들어가요?
성현 (측량도구들을 점검하며) 예. 좀 있다가요.
인부1 크리스마슨데 대충 정리하고 빨리 들어가요.
성현, 마치 몰랐던 사람처럼 조금 놀라다가,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한다.
인부2 허허 거..젊은 사람이...
인부들이 가자 썰렁하게 서있는 철골 구조물 사이, 성현이 혼자 서 있다.
사라져 가는 인부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성현.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흐린 하늘에 어스름이 내려앉아 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건축자재들.
바람에 팔락거리는 붉은 끈(셀로판 접착 테이프 류)을 바라보는 성현
성현, 철골 구조물을 한 번 쓱 올려다보더니, 붉은 끈으로 매듭을 짓기 시작.
썰렁한 철골 구조물에 묶어 보는 성현.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다는 리본 같다.
뒤돌아 멀어져 가는 성현.
바람에 흔들리는 리본 끝자락 너머로
공사장의 불빛이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눈발이 하나 둘 날리기 시작한다.
 
# 6. EXT. 거리 - 1997년 - EVENING (7시경)
운전을 하며 집으로 가고 있는 성현.
저녁 무렵 차창 밖으로 크리스마스 거리 모습이 보인다.
가로등과 거리의 카페에 장식된 트리 장식들.
어스름의 푸른빛과 대조되는 따뜻한 빛깔들이다.
바람이 찬 듯 옷깃을 여미며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과 구세군의 모습.
다소 차분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주변의 차량들도 한적하다.
차 유리창에 눈발이 조금씩 흩날린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 7. EXT. 거리 -1999년 - EVENING(위 씬과 동일시간)
#6에서 이어져 점점 커지는 캐롤송.
거리는 캐롤의 분위기처럼, 온통 트리와 크리스마스장식들로 가득하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고 사람들이 눈을 뭉쳐 놀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흥겹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들뜬 모습으로 지나쳐 가는 흥겨운 분위기.
그 사이 상기된 얼굴로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걷고 있는 은주.
기분 좋게 눈발을 맞는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간다.
한 쪽에서 술 취한 듯한 무리들이
"징글벨, 징글벨" 하며 고래고래 노래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은주, 그 쪽을 돌아보며 싱긋 웃는다.
 
# 8. EXT. 포엠 앞 -1997년 - NIGHT
완전히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 멀리 한 두 개의 불빛들. 어렴풋이 보이는 포엠의 모습.
성현의 차가 집 앞에 선다. 눈은 이미 그쳐 있다.
차에서 내려 들어가려다가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드는 듯,
우체통을 열자 우편물이 들어있다.
봉투를 열어보면 예쁜 카드가 나온다. 카드를 보는 성현.
카메라는 서서히 전진해서 카드의 앞면을 꽉 채우면.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눈 덮인 산 속의 조그만 집 한 채.
그리고 전경의 눈썰매 산타의 모습.
산타의 옆에 있는 예쁜 별이 반짝하는 느낌이 있다.
 
# 9. INT. POEM 거실 - 1997년 - NIGHT
예쁜 별이 반짝거린 위치에서 전등이 탈칵하고 켜지며, 성현이 들어온다.
불이 켜지면 그린 톤의 실내 조명들이 포엠의 분위기를 확연히 드러낸다.
차가우면서도 가라앉은 분위기가 부분적으로 밝혀진 실내 조명으로 형성되고,
스탠드 불빛은 따뜻한 느낌도 있다.
많이 정리된 포엠의 실내. 아주 세련된 느낌의 공간이다.
건축 관련 포스터와 사진들, Secret Garden 공연 내한 공연 포스터 등등이 벽에 붙어 있다.
카드를 무심히 소파 위에 던지는 성현.
오디오로 다가가 ON 버튼을 눌러 Secret Garden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INSERT
카드의 표지.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복된 새해 맞으세요'가 예쁜 글씨로 쓰여있다.
은주 소리>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복된 새해 맞으세요.
편한 옷차림에 샤워라도 한 듯 머리가 살짝 젖은 성현이 나와 부엌으로 향한다.
거실의 차가운 느낌에 비해서는 따뜻하고 밝은 부엌 분위기.
은주소리>
전 당신이 이사오기 전 이 집에 살던 사람이에요.
냉장고 문을 여는 성현. 야채서랍에서 잘 씻은 싱싱한 샐러리를 하나 쓱~ 꺼낸다.
마요네즈를 마치 치약처럼 길게 뿌리고 아작아작 씹으며 싱크대 쪽을 바라보며 서있다.
무슨 요리를 할까 고민을 하는듯...
은주소리>
사실은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남겨요.
프라이팬을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 성현.
양념 통, Fancy한 Olive Oil 병, 뒤집게, 그리고 접시를 마치 정렬하듯 가지런히 놓는다.
물건들을 정렬하면서 기분이 좋은 듯,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아 보는 성현.
프라이팬 기름 위에 계란을 떨어뜨려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은주소리>
기다리고 있는 연락이 있거든요.
혹시라도 제 앞으로 편지가 오면 아래의 주소로 보내주시겠어요?
꼭 부탁드릴께요.
음~ 하고 음미하듯 눈을 감고 안마하는 듯한 성현의 손놀림. 주무르듯 쌀을 씻는 성현의 손.
은주소리>
1999년 12월 22일.
포엠에서의 행운을 기원하며 - 김은주.
눈을 살짝 뜨며 "99년?" 갸우뚱하더니 성현 특유의 표정.
소파 쪽을 한번 바라보고는 밥솥스위치를 올리고....
Secret Garden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면서 가스렌지 앞에 서있는 성현의 뒷모습.
리듬에 맞추듯 성현의 몸이 흔들거린다. 심하지 않게...
순간 휙~ 하늘 높이 올라가는 계란 프라이.
팔을 뒤로 돌려 되받아내는 성현. 만족스러운 표정이 비친다.
 
#10. EXT. 포엠 앞 - 1997년 - NIGHT
은주 소리>
(다시)1999년 12월 22일.
포엠에서의 행운을 기원하며 - 김은주.
추신, 현관 옆에 강아지발자국은 요....
제가 이사오기 전부터 있던 건데요. 벼르다가 결국 못 지우고 떠나네요.
자꾸 보면 익숙해지긴 해요.
포엠의 현관 밖으로 나간 카메라. 현관 앞의 하얀 보도 블록과 마당의 모습,
그리고 집 앞의 빨간 우편함이 보이는 포엠의 전경.
크리스마스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용한 모습.
 
#11. INT. 은주집 - 1999년 - NIGHT
카메라 복도를 track - in 하여 전진하는 카메라.
카메라 다가감에 따라 전화벨 소리가 뚜렷이 들리기 시작한다.
시끄럽게 전화벨이 울리고 있는 은주집의 실내. 어두움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실내의 모습.
은주, 후다닥 문을 열고 들어와 손에 든 것들을 던지듯 바닥에 놓고 재빨리 전화기를 든다.
은주 여보세요? (약간 실망한 듯한)
은주, 더듬더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전원을 켜면 비로소 환하게 밝아지는 실내.
전화의 주인공이 정숙이인 것을 알고 자세가 풀어져 버리면서, 손에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면서 걸친 겉옷을 벗는다.
실내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조명 상태. 은주가 앉은 곳이 밝은 편이다.
은주 정숙이니? 으응.. 아냐... 시끄러운 것도 싫고...
어...난 전화 올 데가 있어서.
그래 재미있게 놀아. 응 메리 크리스마스!
전화를 끊자, 콜라가 쪼르르 달려와 은주의 무릎에 앉는다.
콜라를 쓰다듬으며 음악을 트는 은주. 음악이 잔잔히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경과
잠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은주.
책상 위의 노란 스탠드 불빛만이 밝혀져 있다.
손에 들고 있는 우유 잔을 요리 기우뚱 조리 기우뚱.
책상 위에 놓인 지훈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본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한숨 푸~. 가만히 침대에 눕는다.
잠이 안 오는지 말똥말똥한 표정의 은주. 그만 자야지,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스탠드에 손을 뻗어 불을 끄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후다닥 일어나 전화를 받는 은주.
옆에서 누워 있던 콜라가 놀라서, 침대 바닥으로 퉁~ 떨어진다.
은주 여보세요? (실망한 듯이) 으응.. 주연이니..
아니... 그냥... 피곤해서.... 음 그래. 너두.
전화를 끊는다. 잠시 멍청히 앉아 있던 은주를 쳐다보던 콜라가 길게 하품을 한다.
은주, 침대에서 일어나 집안의 전등을 환하게 다 켜기 시작한다.
TV도 켜고, 라디오도 켜고... 쫄랑쫄랑 은주의 뒤를 따라다니는 콜라.
은주, 가스렌지의 불을 켜서 물을 올려놓는다.
의자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TV를 보는 은주. 마감 뉴스를 하고 있다.
TV에서 곧 방송마감을 알리는 화면이 나오자 멍청히 일어나,
다시 TV와 라디오와 가스렌지의 불을 꺼버리는 은주. 콜라는 잠을 자고 있다.
음음... 하고 목소리를 다듬더니 결심한 듯 전화기를 드는 은주.
전화의 1번 메모리 버튼을 누르자 띠띠띠 하며 긴 번호가 한번에 눌려진다.
전화벨 소리, 그리고 영어로 들리는 자동 응답 메시지...
"Hi, I'm unavailable to answer the phone right now.
So please leave your messages. Thank you."
삐--------
축 쳐지는 은주. 전화를 그대로 내려놓는다.
책상 위의 지훈 사진을 덮어 버린다.
침대에 벌렁 누워버리는 은주. 스탠드의 불마저 끈다. 사방이 어둡고 조용하다.
창 밖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여전히 내리고 있다.
 
#12. EXT. 복덕방 앞 - 1998년 - DAY
늦은 오후. 흐린 날씨.
어두운 복덕방 실내에서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
복덕방 아저씨.(60대)
작은 키에 낑낑대며 셔터에 손을 뻗어 셔터를 내리려고 하고 있다.
성현, 지나가다가 복덕방 아저씨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성현 저어..
아저씨 (힘겹게 손 뻗은 채) 으--응? (반갑게) 집 구하게?
성현 아뇨. 저기.. 빨간 지붕 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아저씨 (그제야 알겠다는 듯) 어~~어. 그 청년이구먼.
고개를 돌려 셔터를 내리려다 갑자기 돌아보며 성현을 묘한 표정으로 유심히 바라보는 아저씨. 성현, 내 얼굴이 뭐 묻었나? 하는 당황함.
아저씨 쯧쯧... 뒤에 덜밀 잡혀서 살아 왔구먼... 앞을 좀 봐...
성현 (황당해서) 예..?
아저씨 (꾸짖는 투로) 젊은이가, 앞을 보고 살아야지!
성현의 황당하고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
다시 무심히 손을 뻗어 셔터를 내리려고 시도하는 아저씨.
아저씨 에이, 작대기가 어디 간 거야...
성현 (다가가 셔터를 내려주며) 저.... 그런데.....
아저씨 (셔터를 마저 내리며) 응?
성현 아뇨.... 그냥..... 저........
혹시 이 전에 그 집에 살던 사람 있습니까?
아저씨 (쐐기를 박듯 큰 목소리로)
무슨 소리야~ 한 달 전에 완공한 집인데.
완전히 새집이야. 새 집!
(자물쇠를 채우며) 고마워.
성현, 다시 무안해진다.
이 때 멀찍이 떨어진 집의 대문이 열리며 임산부(30대의 젊은) 한 명이 이쪽을 보고 부른다.
임산부 (외치며) 여보! 밥 먹으러 와요.
아저씨 (성현에게 대한 것과 사뭇 다른, 아주 다정한 톤으로)
알았어∼ 지금 간다니까∼
아저씨, 성현을 보고 히죽 웃는다.
어색하게 따라 웃는 성현.
 
#13. EXT. 포엠 앞 - 1998년 - DAY
흐리고 침침한 날씨.
성현, 터벅터벅 포엠으로 걸어 들어간다.
대문 앞에 다다르자 어디서인지 모르게 까만 강아지 한 마리가 쫄랑쫄랑 쫓아온다.
추운 듯 오들오들 떠는 강아지의 불쌍한 눈빛. 가만히 앉아 강아지와 눈을 맞춰 보는 성현.
성현 넌 왜 이러고 있니...
성현을 말똥말똥 바라보며 쪼그리고 앉는 강아지.
성현, 대문을 조금 열어 주자 강아지가 조르르 들어간다.
강아지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무심히 현관 앞 블록들을 한 번 보는 성현.
강아지발자국 같은 것은 없는 깨끗한 모습이다.
 
#14. INT. 책 대여점 - 2000년 - DAY(2시경)
통유리창을 통해 가득 쏟아지는 햇살.
정숙, 책을 빌려 가는 여자아이의 이름을 적고 있다.
갑자기 문이 홱~ 열리며, 후닥닥 뛰어들어오는 은주.
정숙과 여자아이의 시선이 은주에게 집중된다.
은주 '우리 집으로 오세요' 나왔어?
정숙 (은주를 빤히 보다가 여자아이를 보면서) 너두니? 똑같다 똑같아.
(돈을 받고 책을 봉지에 넣어주면서) 아직 안나왔어.
은주 (아쉬워하며) 왜? 오늘까진 나온다고 그랬잖아.
여자아이 나간다.
정숙 (여자아이 방향으로) 잘 가라~
(은주를 보며) 나와야 나오는 거지. 날짜 지켜 나오는 거 봤니?
그래도 아쉬운 표정의 은주. 카운터에 놓인 만화책들을 괜히 들척여 본다.
정숙(계속) 지훈씨한테선 연락 없지?
(은주를 힐끔 보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너... 제발 정신 좀 차려. 응?
은주 표정이 약간 어두워지지만 금새 카운터의 전화기를 든다.
팔짱을 끼고 은주의 행동을 쳐다보는 정숙.
은주 (점잖은 목소리로) 아 여보세요. 예. 여기 ++(책대여점)인데요.
오늘 '우리집으로 오세요' 안나왔나요?
(실망한 목소리...) 아아 예에....
(전화를 끊으려다가) 근데 그거 어떻게 되요? 네?
(밝게) 둘이 결국 만났죠?
기가막히다는 표정의 정숙.
 
#15. INT. POEM 마당 - 1998년 - DAY(오후 2시경)
파란 하늘에 따스한 겨울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POEM 마당.
한쪽에서 들리는 뚝딱뚝딱 소리.
성현이 열심히 개집을 만들고 있다. 강아지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휘파람을 불며 녹색의 지붕 아래에 빨간 우편함과 똑같은 색깔로 개집 몸통을 칠하는 성현.
한쪽 면을 칠하고 다른 면을 칠하려고 개집을 옮기다가
페인트 통을 잘못 치면서 페인트가 쏟아진다.
바닥에 퍼지는 빨간 페인트.
성현이 급하게 일어나 페인트를 닦을 만한 것을 찾으려고 허둥대는 사이
강아지가 페인트를 밟고 지나가, 성현의 뒤를 따라 현관 앞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성현은 강아지를 잡으려 하지만 이미 현관 앞까지 뚜렷하게 찍혀져 있는 개발자국.
심난한 얼굴의 성현. 하지만 곧이어 뭔가가 떠오르는 표정이다.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발자국을 들여다보는 성현.
 
#16. INT. 포엠 침실 - 1998년 - DAY(2시경)
창문을 통해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침실.
컴퓨터를 또깍 켜는 성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17. INT. 책 대여점 - 2000년 - DAY (오전 11시경)
한가한 책 대여점의 실내.
카운터에 앉아 있는 은주와 정숙. 은주, 손에 편지를 들고 있다.
꼬마가 다가오자 정숙은 꼬마를 쳐다보며 입모양으로 뭐? 하고 묻는다.
만화책 두 권을 내미는 꼬마.
은주 (편지를 다시 한번 보며) 장난이겠지? 응?
정숙 (만화책을 봉투에 담으며) 그래~ 말이 되니?
(꼬마에게) 600원이다.
은주 98년도... 답장 한번 써볼까?
정숙 (꼬마에게 1,000원을 받으며) 미쳤니? 이상한 사람이면 어쩔라구?
은주 정말이면 좋겠는데...
정숙 (금고를 열며) 응?
은주 아..니.
정숙, 멍청한 표정으로 있는 은주를 한 번 쳐다보며,
정숙 (동전을 세어보며) 은주야, 새핸데,
(거스름돈을 주고 나서 은주 쪽으로 돌아앉아)
제주도나 다녀와. 부모님도 만나고... 바람도 쐬고....
은주 응? ....그럴까 ...
은주, 정숙을 보며 씩 웃는다.
손에 들고 있는 편지를 한 번 무안한 듯 들어 흔들어 보는 은주.
 
#18. EXT. POEM 우편함 - 2000년 - DAY(오후 1시경)
우편함이 열린다. 안을 들여다보는 은주.
비어있는 우편함의 시점에서 본 은주의 맑은 눈빛. 이상한 일이야~하는 은주의 표정.
성현의 목소리로 편지내용이 흐른다.
성현 소리>
"기다리는 편지가 있는 것 같아서 알려드립니다.
제가 이 집의 첫 번째 주인인데, 편지를 잘못 보내신 것 같습니다.
꼭 받아야 할 우편물이 있다고 하시니 한번 확인해 보고 다시 편지를 쓰시는 게
좋을 듯 하군요.
1998년 1월 2일
한성현
추신 : 그런데 이 집 이름이 POEM인걸 어떻게 아셨죠?"
POEM을 기웃거리는 은주. 혹시나 하고 POEM 앞 주위를 둘러본다.
<POEM>이라 쓰여진 현판이 클로즈업.
 
#19. INT. 복덕방 - 2000년 - DAY(오후 1시경)
햇살이 들어오는 실내는 밝고, 햇살이 닿지 않는 곳은 침침한 느낌의 복덕방 실내.
아저씨는 화투장을 쭉 펼쳐 놓고 뭔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지 간간이 작은 탄식을 한다. 그 옆에서 아줌마가 두 살짜리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문을 벌컥 열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서는 은주.
은주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주머니!
아저씨 여~ 성우 아가씨. 오랜만이네.
애를 추스르느라 그냥 건성으로 인사를 받는 아줌마.
은주 (아기를 보며) 야∼ 얘도 그새 많이 컸네.
아저씨 (히죽 웃으며) 그지?
아저씨, 아기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는다.
은주, 아저씨가 펼쳐 놓은 화투장을 바라보며,
은주 또, 화투점 치시는 거예요?
아저씨 (은주를 돌아보며 반갑게) 한 번, 봐줄까?
은주 (웃으며) 아니요∼
(귀엽게) 이거 근데 정말 맞는 거예요?
새해가 오기 전에 사랑이 나타날 거라구 하셨잖아요!
근데...(혼잣말처럼) 전화 연락도 한 번 안 오던데요, 뭐...
아저씨 (답답하다는 듯이 조금 흥분하며)
아, 괜히 딴 생각 하지말고 기다려∼
글쎄, 간절히 바라면, 나타난다니까....
은주, 장난스럽게 웃는다.
아저씨 (괜히 무안한지, 흥분을 가라앉히며) 근데, 웬일이야?
은주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아, 참, 맞아,
저기요, 아저씨, 혹시 POEM 나갔어요?
아저씨 아직. 요즘 집 잘 안 나가잖아.
은주 저... 거기 잠깐 가봐도 돼요?
아저씨 거기? (긁적 긁적) 그래.. 그렇게 해.. 그럼.
(열쇠를 찾기 시작)
은주 저.... 아저씨, 예전에 POEM에 어떤 사람이 살았었어요?
아저씨, 갑자기 열쇠를 찾던 손을 멈추며, 문득 은주를 유심히 본다.
은주 (당황하며) 아, 아니예요...
아저씨,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열쇠를 꺼내 은주에게 내민다.
뭘 잘못 물어봤나? 하고 의아해하며 뻘쭘하게 열쇠를 받는 은주.
 
#20. INT. POEM 침실 - 2000년 - DAY(오후 1시∼2시경)
창문을 통해 스며 들어오는 햇빛만으로 밝혀진 포엠 실내.
햇빛이 비침에 따라 빈 집 안에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이 보인다.
주관적 시점으로 보여지는 포엠 내부.
휑하니 비어있는 방안. 내부가 아주 조용하다.
이삿짐 박스와 노끈들이 군데군데 바닥에 남아있다.
정이 한껏 묻어있는 행동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는 은주.
벽에 아직도 붙어있는 접착 옷걸이를 당겨보기도 하고,
물이 끊긴 수도 밸브를 풀었다 조였다 풀었다 조였다 해보는 은주.
액자가 걸려있던 자국을 스~윽 만지며 걸어가 창문 앞에 선 은주.
커튼을 쭈욱 젖히고, 창문을 연다.
순간 바깥 소음이 들리며, 함께 찬바람이 불어온다. 은주의 앞머리가 가볍게 날린다.
은주, 천천히 돌아서서 창문에 몸을 기대어 방을 다시 한번 훑어본다.
한 쪽 벽면에 미로처럼 보이는 에셔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아래의 바닥에 떨어진 낡은 종이 위에 눈길이 멈추는 은주.
천천히 다가가 종이를 펼쳐 보면 스케치와 유사한 그림이 담겨있다.
INSERT
바닷가에 있는 집 한 채.
아직 완성되기 전 단계의 스케치로 보이지만 집의 모양은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스케치의 하단에 쓰여져 있는 글씨. -- 98. 3. 時越愛 --
종이를 들어서 유심히 보는 은주.
은주의 얼굴에서, 앞쪽으로 카메라 Round Tracking 서서히 이동하면,
종이의 뒷면의 하얀 지면이 카메라를 가리고....
 
#21. 포엠 우편함 앞 - 1998년 - MORNING (오전 8시경)
종이 뒷면 하얀 지면에서 카메라 빠져 나오면 편지(#22에서 우편함에 넣어지는)를
읽고 있는 성현의 모습.
우편함 앞에서 막 편지를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출근하러 나가는 길인지 간단한 가방을 하나 들고, 은주 편지를 손에 들고 갸우뚱하고 있는 성현. 역광으로 비추어 지는 아침 햇살이 따뜻하다.
(#23의 앞부분을 선행시켜 보여주는)
 
#22. EXT. POEM 우편함 - 2000년 - DAY(오후 2시경)
우편함 앞에 선 은주. 정성스럽게 편지를 집어넣는다.
천천히 돌아서서 걷는 은주.
화면을 가리면
은주 소리>
"어떻게 제 편지가 당신에게 가게된 건진 모르겠지만,
 
#23. EXT. 포엠 우편함 앞 - 1998년 - MORNING (아침 8시경)
화면을 가리웠던 몸을 치우며 우편함 쪽으로 걸어가는 성현.(위의 은주와 반대방향)
한 손에 편지를 들고 우편함을 이리저리 찬찬히 바라본다.
은주 소리>
혹시 장난하신 거라면 POEM에 도착하는 편지들을 그냥 놔둬주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2000년 1월 5일(눈에 띄게)
김은주
설마 정말 98년도에서 편지를 보내시는 건 아니겠죠..."
성현 (기억을 더듬어 본다) 김.. 은... 주..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편지를 손에 들고 자동차의 키를 돌려 자동차를 타는 성현.
붕∼ 하고 출발하는 성현의 차.
 
#24. EXT. 제주도, 은주의 집 앞 - 2000년 - DAY(오후 3시경)
돌로 된 나지막한 담장 사이를 걷고있는 은주. 예쁘게 지어진 아담한 이층집 앞에 멈춰 선다. 마당 안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은주.
마당에는 7살짜리 꼬마여자아이(혜기)가 세발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다.
은주 혜기야.
혜기 고~~ 모~~~~~~
은주가 집으로 들어서는데, 혜기가 맹렬히 달려와 은주의 목에 매달린다.
은주 어머니와 새언니, 부엌에서 손을 닦으며 나온다.
짐을 내려놓으며
은주 엄마, 저 왔어요.
은주 어머니, 은주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25. EXT. 제주도, 바닷가 - 2000년 - DAY→해질 녘 (오후 5시경∼6시경)
바닷가에 자전거를 끌고 걷고 있는 혜기와 은주. 쉴새없이 떠드는 혜기의 목소리가 들린다.
(혜기의 보물 이야기 :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환상에 대한..)
재미있게 혜기의 이야기를 듣는 은주. 발밑에 무언가 채이고, 자전거를 세운다.
가만히 앉아보면 예쁜 소라껍질. 은주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소라껍질에 묻은 모래들을 털어 내는데.. 혜기도 은주 옆에 쪼그려 앉는다. 은주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는 혜기.
주의 깊게 듣던 은주
은주 (깔깔 웃으며) 여기에 천사가 산다구?
혜기 응.
혜기, 소라껍질을 들어 귀에 갖다대 본다.
혜기 거봐. 들려. 들리잖아, 고모. 고모도 들어봐.
혜기가 건네는 소라껍질을 귀에 대는 은주.
혜기 (손짓까지 해가며) 들리지?
은주 (가만히 듣는다) 응. 들려. 이게 천사야?
혜기 응. 천사가 잠자는 소리야.
은주가 눈을 감고는 가만히 소라껍질 안의 소리를 듣다가...
은주 어~~ 무슨 소리가 들려. 혜기야. 뭐라고 하는데?
혜기 정말? 줘 봐 고모. 줘 봐...
은주 (혜기의 등뒤로 돌아가 자리를 잡으며 소라고동을 귀에 대준다)
눈 감아봐, 혜기야.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눈을 꼭 감는 혜기의 얼굴 클로즈업되면서.
은주소리 (성우 목소리) 혜기니?
혜기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다가 다시 감으며) 네!
은주소리 아우~ 졸려. 날 벌써 깨우면 어떻게 해?
난 니가 스무살 되는 날 깨어나기로 되어 있단 말야.
그 때까지 착하게 살면 혜기의 소원을 들어줄께.
그럼 그 때 만나자. 안녕~
혜기 안녕~~
그래도 가만히 듣고 있는 혜기.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은주를 돌아본다.
흥분된 표정의 혜기.
혜기 고모. 고모. 천사가...
은주 쉿!
혜기, 말똥말똥 은주를 쳐다본다.
은주 (나즈막히)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해 버리면 소원이 안 이루어지는 거야.
혜기 응. 알았어. 이야기 안해.
혜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은주. 혜기는 역시 들뜬 표정으로 소라에 다시 한번 귀를 댄다.
소라껍질의 모래를 조심스럽게 털어 내는 은주. 은주도 가만히 귀에 대본다.
두 사람의 모습 뒤로 이제 해가 지려는지 붉게 물들어 가는 바다가 조용히 움직인다.
해가 지는 풍경의 바닷가 태양의 모습에서 포엠의 해지는 모습으로 연결되며...
 
#26. EXT. 포엠 앞 - 1998년 - EVENING (6시경→7시경)
석양의 모습에서 카메라 빠지면, 포엠 앞의 깜박이는 전등.
포엠 앞에 달려있는 전등 하나의 불이 깜박이고 있다.
한 남자(한교수, 50대후반)가 포엠 앞에 서서 그 전등을 바라보고 있다.
깜박이는 가로등에 다가가서 만져보는 한교수. 곧 불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뒤로 물러서 포엠 전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교수.
해가 이미 저물어 어두워진 하늘. 천천히 포엠의 주변을 걸어다니던 한교수, 차에 올라탄다.
한교수의 차가 지나가고 나면 길의 한 귀퉁이에서 포엠 쪽을 주시하고 있던 성현의 차가 보인다.
성현, 표정이 어둡다.
 
#27. INT. 책 대여점 - 2000년 - DAY (3시경)
성현의 어두운 표정과는 달리 약간 멍청한 은주의 얼굴.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목이 막히는지 꼭꼭 씹으며 벌떡 일어난다.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한 손에는 편지를 들고, 정숙에게로 가며 감정을 넣어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은주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넘기며, 약간 과장된 목소리로)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편지가 계속 제 우편함으로 들어오고 있군요.
기다리는 편지를 받으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1998년 1월12일. 한 성현.
추신 : 그리고 설마가 아니라 당연히 지금은 98년도입니다.
편지를 읽으며 좁은 책과 책 사이를 지나 정숙을 졸졸 따라다니는 은주.
만화책을 한아름 안고 제자리에 책을 꽂고 있는 정숙.
정숙 너 또 썼니?
은주 (멋쩍어하며) 으..응... 근데 정숙아...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니?
정숙 뭐가?
은주 정말... 98년 일 지도 몰라.
정숙 (황당하고 기막혀서) 너 지금 장난하니?
은주 (편지를 흔들며)
보라니깐. 딱 두 줄. 딱딱하고, 건조하게. 이런 장난이 어딨니?
정숙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너 저기 포스터나 문 앞에 좀 붙여.
은주, 입을 삐죽 내밀고 걸어가 카운터 앞의 말려진 포스터 몇 장을 펼친다.
은주 (그 중 한 포스터를 보고) 어, Secret Garden 오네?
정숙 참, 너 그~ 전에 가려다 못 갔었지.
갑자기 콘서트 취소되는 바람에...
은주 갔었지 왜. 넌 시간 없대지, 지훈씨는 콘서트 같은 거 취미 없지.. 그래서 불쌍하게 혼자 갔다가.. 그 날 정말 추웠다.
그게 벌써 언제니?
갑자기 눈빛이 반짝하는 은주.
 
#28. INT. POEM 침실 - 1998년 - NIGHT (밤 10시경)
책상 위에 놓여진 스케치북을 펼치는 성현. 하얀 종이가 보인다.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침대로 가는 성현.
그 옆에 놓여있던 기사(신문의 일부를 카피 한 듯)가 은주의 편지와 함께 나란히 눈에 들어온다.
<1월 25일자. "Secret Garden 콘서트 취소" 기사>
피식 웃는 성현. 그 옆으로 시크릿 가든 공연 티켓이 한 장 놓여 있다.
성현 소리>
"기다리는 편지가 있다고 해서 답장을 보냈던 것뿐입니다.
이제 더 이상 편지를 넣지 말아 주십시요."
침대에 누워 스케치북을 펼치고 무얼 그릴까 생각하는 듯한 성현.
잠시 후, 침대 아래쪽에 누워 자고 있는 콜라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29. EXT. 예술의 전당 입구 - 1998년 - NIGHT (7시경)
형광등으로 밝혀진 어두운 지하도를 급하게 걸어가고 있는 구두소리가 들린다.
지하도를 통과해서 나타나는 성현의 모습. 시계를 보며 급하게 걷는다.
지하도에서 나오면 밝게 밝혀져 있는 예술의 전당 앞이다.
성현, 갑자기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보는 데 아무도 없다.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다시 걷는데,
옆으로 후다닥 뛰어가는 긴 머리의 여자(98년도의 은주).
 
#30. INT. 예술의 전당 내 - 1998년 - NIGHT (8시경)
콘서트 홀이 저만치 보이는 곳에 서있는 성현.
카메라에 잡힌 콘서트 홀. 외부 조명만 밝혀져 있을 뿐, 내부는 컴컴하고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성현.
콘서트 홀 입구에서는 어떤 여자와 대화하는 수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자소리(o.s.) 취소요? 왜요?
수위소리(o.s.) 몰랐어요? 방송이며 신문이며 다 나갔을 텐데..
걸음을 멈추는 성현. 가만히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낭패 어린 얼굴로 시크릿 가든 공연 표와 팜플렛을 들고 내려오는 여자.
성현의 옆으로 또깍또깍 구두 소리를 내며 성현을 지나쳐 간다.(긴 머리의 은주).
 
#31. EXT. 예술의 전당 음악당 앞 - 1998년 - NIGHT (8시경)
성현, 음악당의 문을 열고 나오려 하는데 98년의 은주(아마도 화장실에 갔다가)
역시 막 나오려는 참이었는지, 성현이 원형 문을 밀고 나오는데
뒤쪽의 원형문 한 칸에 쏙 들어온다.
성현, 얼핏 은주의 얼굴을 돌아보고, 우연히 서로 눈길이 마주치는 두 사람.
은주는 성현을 한 번 보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원형 문을 나오자 종종 걸음으로 걸어나가 목도리를 칭칭 두르는 은주.
은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성현.
담뱃갑이 나온다. 뒤져보지만 빈 갑이다. 담뱃갑을 구기면서 긴 한숨을 내 쉬는 성현.
또각또각 은주의 구둣발은 멀어져 간다.
성현 소리>
"2000년이라고 하셨습니까?"
 
#32.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10시경)
읽던 편지에서 눈을 떼는 은주. 멍한 표정.
바닥에 양반 다리로 앉아 부동 자세로 창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무의식중에 한 손에 들고 있던 콜라 캔을 떨어뜨린다. 쪼르르 굴러가는 콜라 캔.
정숙(o.s) 야!!!! 다 탔잖아.
정숙, 화장실에서 손에 만화책 한 권을 들고나오며 가스불을 급하게 끈다.
정숙 야! 너 왜 그래?
은주 엉?
(편지를 들고 망설이다가 서랍에 넣어버린다) 아냐.
역시 멍한 표정으로 콜라를 주워 따는 은주.
한껏 흔들렸던 콜라가 터지면서 온통 난장판이 된다.
정숙 야!!!
은주, 놀라서 두루마리 휴지를 휘휘 빼서 콜라를 마구 닦고 있는 모습.
정숙이 구박하는 듯한 행동, 콜라는 신나게 달려와서 바닥의 콜라를 마구 핥아먹고...
이런 FS의 화면 위에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며...
 
#33. 몽타쥬 - 1998년/2000년
2000년
포엠 앞, DAY
파란 하늘.....아물거리는 수평선을 뒤로하고 조용히 서 있는 빨간 우편함.
느낄 듯 말 듯 카메라가 서서히 Dolly In.
우체통 앞으로 다가서는 은주 Frame In. 우편함을 열어본다. 비어있다.
신기한 듯 미소. 잠시 머뭇거리다가 생각이 난 듯 머리띠를 빼내 우편함에 넣어본다.
잠시 손을 뒤로한 채 기다려보는 은주.
머리띠를 벗은 은주의 머리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우체통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는 은주의 손. 아무것도 없다. 헤~ 벌어지는 은주의 입.
갑자기 가방에 팔을 넣어 휘저으며 뒤적이기 시작한다.
은주 소리>
(흥분한 목소리) 맞군요. 2년 전으로 편지가 간 거 맞군요!!
1998년
포엠 앞, DAY
우체통 문이 열리면, 온갖 물건 (은주의 머리띠, 콤팩트, 립스틱, 휴지 등등)들이 성현의 발 밑으로 와르르 쏟아진다.
피식 웃는 성현의 표정위로 흐르는 은주 편지.
은주 소리>
혹시 만화 영화 보세요? 그 때면 내가 뭘 했더라?
2000년
은주집, NIGHT.
98년도 수첩을 꺼내드는 은주의 손.
수첩이 펼쳐지고 1월 달 스케줄이 보여지고, '달려라 하니'라고 여러 칸에 쓰여 있다.
꽂혀져 있는 비디오 테이프를 쭉 보다가 <달려라 하니>를 찾아내는 은주의 손.
<달려라 하니> 화면을 틀어 놓고, 내가 저랬구나! 하면서 똑같이 따라해 보는 은주.
화면 속의 시골아줌마, 운동장에서 하니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
은주더빙소리(시골아줌마 역)> 이겨라~~~
1998년
포엠, NIGHT
<달려라 하니>가 TV화면으로 보이고,
은주더빙소리> 아~~~~ 하니야~~~~~~
만화를 보면서 깔깔 웃는 성현.
성현 소리>
괜히 봤어요. 은주씨를 생각하면 그 아줌마가 떠오릅니다. 정말 비슷합니까?
2000년
은주집 욕실, NIGHT
이빨을 닦으려고 치약 묻은 칫솔을 물다가, 거울을 보는 은주.
칫솔을 문 상태에서 그 아줌마 같은 표정을 지어본다.
1998년
포엠, 오후 5시경
해질 녘의 부드러운 햇살이 쓸쓸하게 포엠에 드리워져 있다.
성현, 긴 소파에 누워 팔을 위로 들고 편지를 읽고 있다.
은주 소리>
혼자가 쓸쓸해요. POEM에서는 친구와 같이 살았는데... 너무 익숙해졌나봐요.
조용히 웃는 성현.
2000년
은주집, 오후 5시경
위와 비슷하게 쓸쓸한 분위기의 은주집 실내.
은주, 침대에 엎드려서 편지를 쓰고 있다. 편지지들이 지저분하게 바닥에 떨어져 있다.
성현 소리>
함께 라고 해서 꼭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죠.
1998년
포엠 앞, 포엠 (DAY→NIGHT)
은주 소리>
아아 그러고 보니 성현씨가 콜라 주인이었구나. 사람처럼 자는 강아지 맞죠?
- (DAY) 포엠 앞에 붙여져 있는 "주인을 찾습니다."라고 쓰인 전단을 떼어내는 성현.
- (해질 녘) 포엠 거실에서 콜라는 사람처럼 등을 바닥에 대고 잠들어 있다.
성현 니가 "콜라" 였니?
자고 있는 콜라의 얼굴위로 성현의 얼굴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다가오자, 갑자기 눈을 뜨고 성현의 코를 핥는 콜라.
눈을 찔끔거리지만 싫지 않은 듯, 마루에 엎드려 콜라와 장난을 치는 성현.
성현 소리>
뭐 하나 물어 봐도 될까요? 기다리던 편지에 대해서............
- (NIGHT) 콜라는 놀다 지친 듯 새근새근 자고 있다.
따스하게 웃으며 편지를 써 내려가는 성현.
스탠드 불빛만이 밝혀진 실내에 고요한 성현의 모습에서 음악 사라지며...
 
#34. INT. 은주집 우편함 - 2000년 - DAY(오후 3시경)
엉덩이로 문을 주욱 밀고 들어서는 은주.
한 손에는 저녁거리가 잔뜩 든 비닐봉투를 들고, 다른 손에는 먹던 아이스크림 콘을 쥐고...
우편함을 슬쩍 들여다본다. 삐죽이 나와있는 항공우편이 하나 눈에 띈다.
너무나 기뻐하며 손에 들었던 물건을 철퍼덕 내려놓아 버리고,
아이스크림을 든 손으로 봉투를 꺼낸다. 툭 떨어져 버리는 아이스크림 콘 덩어리.
겉봉을 보는 은주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 Jihoon Park
4343 N. Clarendon #2108
CHICAGO IL 60613
U.S.A >
<주소 불명!!>
 
#35. INT. 녹음실 - 2000년 - DAY(2시경)
만화 영화를 녹음하고 있는 성우들. 멍하니 있던 은주. 대사를 놓치고 만다.
PD 은주씨.
(약간 신경질 적으로) 오늘 자꾸 놓치잖아.
은주 (정신을 차리며) 죄송합니다.
(옆에 있는 성우들에게도) 죄송합니다.
다시 녹음 간다. 깔깔 웃으며 만화 대사를 치는 은주의 눈에 눈물이 살짝 비친다.
시간 경과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 드는 은주.
은주 수고하셨어요.
모두들 수고했어요.
성우들 몇 명, 문을 열고 나가고 은주가 가려고 나가는데, 저쪽에서 걸어오던 PD.
PD 은주씨, 수고했어.
근데, 오늘 은주씨 이상하네?
은주 죄송해요.
PD 미리 미리 시사 좀 많이 해.
은주 네.
애써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하는 은주.
 
#36. EXT. 건널목 - 2000년 - DAY (5시경)
비가 올 듯 흐린 하늘.
건널목에 선 은주. 옆으로 공중 전화 박스가 보인다.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고개를 휙 돌려 정면을 바라보는
은주. 눈을 꼭 감는다.
갑자기 이전 씬에서 실수했던 대사를 중얼중얼 연습하는 은주. 옆 사람이 놀라면서 은주를 쳐다본다. 그 사람을 보며 씨~익 웃어주는 은주.
파란 불로 바뀌고, 길을 건너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활발한 발걸음 뒤로 은주만 남겨진다.
 
#37. EXT. 공중전화 박스 안 - 2000년 - DAY (5시경)
벌컥 문을 열고 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서는 은주.
잠시 망설이다가 버튼을 꾹꾹 누른다.
002-1-773-871-7972
또르르~ 또르르~
긴장된 표정의 은주.
수화기(o.s.) (여자의 목소리) hello. hello~~ 여보세요?
놀라 전화를 뚝 끊고, 휙 돌아서 나가는 은주.
공중 전화 박스의 문이 열린 채, 흔들거리고 있다.
은주소리> 기다리던 편지는...... 전화하지 않는...... 사람의 편지입니다.
 
#38. INT. 포엠 부엌 / 은주집 주방 - 1998년/2000년 - NIGHT
1998년
성현소리> 스파게티가 잘 익었는지 알아보려면...
- 스파게티 국수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모든 재료가 완벽하게 준비된 성현의 주방.
2000년
성현소리> 힘껏 던져요.
- 벽에 힘껏 국수 한 가닥을 던지는 은주. 벽에 퍽 맞고, 주욱 미끄러지는 국수.
1998년
성현소리> 잘 붙으면 훌륭하게 익은 거예요.
- 잘 차려진 성현의 식탁. 음식을 맛있게 먹는 성현.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근사한 성현의 정찬.
2000년
-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앉는 은주. 식탁 옆 벽이 국수 자국으로 엉망이다.
성현소리> 이젠........ 외롭지 않죠.
기다림은 결국 상처가 됩니다. 기다리지 마세요..
은주, 국수를 한가닥 들어 입을 아~ 벌리고 쏙 집어넣는다.
맛있게 얌얌 먹는 은주.
하지만 막 넘기려는 순간, 국수가 목에 걸렸는지 켁~ 켁~하고 기침을 한다.
목이 막히는 듯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휴~ 하고 숨을 가다듬는다.
스파게티를 멍청히 바라보는 은주. 다시 한 번 휴~~~~
 
#39.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위~~잉.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은주. 대청소를 하려는 듯 이것저것 뒤적인 흔적이 있다.
열심히 청소를 하다가 은주의 눈에 들어오는 시카고 지도. 바라보다가 지익 뜯어낸다.
꾸깃꾸깃 쓰레기 봉투에 집어넣는 은주. 책꽂이며 옷걸이며, 뒤지면서 이것저것 버리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을 싹
쓸어 담는 은주.
가득 차 버린 쓰레기 봉투를 묶으려 하는데, 너무나 활짝 웃고있는 지훈의 독사진이 삐죽이 보인다. 몸을 숙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는 은주.
잠깐 망설이다가 그 사진을 집어들어 먼지를 툭툭 털어 낸다. 탁자 서랍 속으로 사진을 넣는 은주.
드르륵~
 
#40. INT. 학교 복도 - 1998년 - DAY(2시경)
햇살이 들어오는 밝은 복도.
복도를 걷고 있는 성현.
건축 모형을 들고 가던 학생들이 꾸벅 인사를 하기도 하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기도 한다.
학생1 (성현을 툭 치며) 오랜만이야!
미소짓는 성현의 표정.
성현이 강의실을 지나가면서 정감 어린 표정으로 실내를 지켜본다.
지저분하고 왁자지껄한 작업 분위기.
밝은 강의실의 분위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성현의 모습.
성현, 코너를 꺾어져 들어가자 무슨 무슨 교수 명판들이 방마다 걸려있고, 조용하다.
창문이 있던 복도가 끝나고 형광등이 건조하게 밝혀져 있다.
조금 긴장하는 듯한 성현의 표정.
교수실의 문패에 달린 이름을 얼핏보다가 "한석진"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얼굴이 굳어지며 빠르게 지나쳐 가는 성현.
복도의 맞은편에서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코너를 돌아 들어오는 사람은 한석진 교수. 얼굴빛이 어두워 보인다.
한교수를 발견하고 굳어지는 성현.
한교수, 성현을 보고 잠시 멈칫한다.
성현, 눈을 맞추지 않고 무시하듯 스치고 지나간다.
한교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돌아서서 성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복잡한 표정의 한교수. 묵묵히 걷던 성현.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한교수가 뒤돌아 걷기 시작) 멈칫한다.
돌아서 무슨 말이든 할 듯... 뒤를 돌아본다. 이미 한교수는 저만치 멀어져있다.
복도에 울리는 발자국 소리. 성현, 몸을 돌려 복도를 빠져나간다.
 
#41. INT. 빨래방 - 2000년 - NIGHT
위~잉.
각각의 세탁기 안에서 빨래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팔 걷어붙이고 세탁기에 빨래를 잔뜩 집어넣는 은주.
세탁기 옆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아 편지를 읽는다.
성현 목소리>(차분히)
빨래를 하면 정말 좋지 않은 기억들이 잊혀집니까?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은주씨 편지가 제 손에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깨끗이 지워버린 98년도를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보라구요.
빨래방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활발한 움직임 속에
환하게 웃는 은주의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42. INT. POEM 욕실 - 1998년 - NIGHT
탈수가 마무리되는 듯 털털거리고 있는 세탁기.
세탁기 앞에 멍하니 서있는 성현.
딩동딩동~
성현이 정신을 차린다.
성현, 현관문을 열면 벌컥 들어오는 사람은 재혁(27세).
들어오자마자, 성현 어깨를 툭 치며,
재혁 (시끄럽게) 야! 너 아까 학교에 왔었대며?
근데 나한테는 도대체 왜 안 온 거냐?
핸드폰 꺼놨냐? 전화도 안되고.... 내가 이렇게 몸소 와야 겠냐?
성현, 그냥 비실 웃는다.
재혁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애교 있게)
성현아∼ 사실은,
(의자에 앉으며 가방에서 도면을 꺼낸다.)
이것 좀 봐 달라구.... 밀레니엄 하우스 공모전에 낼 건데....
(뒤적뒤적 도면을 펼치며) ....
성현(o.s) 나 주택 설계 못 하잖아. 지난 학기에 빵구 났던 거 잊었냐?
재혁 (도면을 책상에 놓으며) 그거야... 니가 안 한거지∼
재혁,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성현이 없다. 멍청하게 두리번거리는 재혁.
성현, 침실에서 겉옷을 걸치고 나온다.
재혁 (황당해하며) 어디 갈려구?
 
#43. EXT. 도로 - 1998년 - NIGHT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재혁 한 마디로 말해서... 내 말은...
(듣고 있는지 성현을 얼핏 보며)
너는 건축을 할 놈이지 토목공사장에 있을 놈이 아니라구.
한 학기만 마치면 되는데... 아깝지도 않냐?
뒤로 의자를 한껏 눕히고 조수석에 앉아있는 성현.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거의 듣고 있지 않은 듯.
재혁 다음 학기에 복학 할꺼지?
(성현을 툭치며) 응?
성현,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으며 창 밖을 주의 깊게 내다본다. 깜짝 놀라는 재혁.
공사중인 건물의 안내푯말이 보인다. (공사중-1999년 12월 open!)
성현 (다급히) 이... 이 쪽. 재혁아 차 좀 붙여 봐.
 
 
#44. EXT. 은주집 공사장 - 1998년 - NIGHT
자동차 세워 놓고, 거기에 기대서 담배 피우는 재혁과 옆에서 멍하니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성현.
재혁 한밤중에 집 짓는데는 왜?
성현 (재미있다는 표정) 정말 이었네.
재혁 (담배를 끄다가) 뭐가?
성현 (웃음이 흐른다) 응? 아니... 허 참.
야, (재혁을 툭 치며) 빨래를 하면 잊고 싶은 기억이 잊혀진단다.
재혁 이거 진짜 돌았네.
성현 정말이야.
재혁 (정말 걱정이 된다는 듯이) 너 무슨 일 있냐?
성현 하하하.
(아직 미소가 가시지 않은 얼굴) 어떻게 생겼을까?
재혁 누구?
성현 이 집에 살 여자.
재혁 야! 한성현.
성현의 웃음소리와 재혁의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공사중인 은주집의 전경이 보인다.
 
#45. EXT. 은주집 외관 - 2000년 - NIGHT
한 밤 중.
공사 중인 은주집 건물이 완성된 건물로 바뀌어 있다. 켜져 있는 창문의 불빛들.
은주집의 창문에서 불이 반짝 켜진다.
 
#46.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은주집 실내.
은주가 불을 켜고 바구니에서 마른빨래들을 우르르 쏟아 놓는다.
시간 경과
녹음기의 웅,웅거리는 소리.
한 쪽에 빨래들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고 은주는 오래된 듯한 녹음기를 들고,
찰칵 찰칵 하고 있다.
고장 난 듯 하다.
겨우 플레이되는 녹음기.
은주 된다!
우~~ 우~~~ ㅇ.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는 녹음기.
#47. INT. 전철역 매표소 - 1998년 - NIGHT
이어폰을 통해 흐르던 음악이 이어지면서 흐른다.
성현이 새치기하면서 급하게 전철표를 끊고, 계단을 두칸, 세칸 뛰어내려간다.
 
#48. EXT. 전철역 플랫폼 - 1998년 - NIGHT
은주 소리> 97년도에 되돌리고 싶은 일이요?
있어요!
가장 친한 친구가 성우된 기념으로 사준 녹음기를
잃어버렸어요...........
.
전철 플랫폼에 들어서는 성현.
급하게 이쪽 저쪽 벤치를 기웃거리며 은주를 찾는 성현.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
열차가 서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자 더 찾기 힘들어하는 성현.
성현이 벤치에 앉아있는 은주인 듯 보이는 여자를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98년도의 은주.
후다닥 열차로 뛰어드는 은주. 은주가 타자마자 닫혀버리는 문.
녹음기만 덜렁 벤치 위에 있다.
은주가 흘린 녹음기를 주워들고 열차 쪽으로 다가가는 성현. 하지만 출발하려는 전철.
전철에 타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은주의 모습을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멍해져서 바라보는 성현. 은주의 얼굴을 보면서 묘한 느낌을 받는다.
은주, 막차를 탔다는 안도감이 얼굴에 서려 있다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변하면서 그제야 녹음기가 없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면서 성현 쪽으로
돌아보려는 찰라에 열차는 떠나고 만다.
맥없이 돌아서는 성현.
다시 벤치로 가서 앉는다. 조금 숨이 찬 듯 성현의 입김이 하얗게 나온다.
녹음기를 바라보는데, 안에 있는 테이프가 조금 감겨져 있다.
리와인드 하는 성현.
녹음기를 플레이시키다가 너무 큰 소리에 깜짝 놀라는 성현.
은주의 목소리> (지하철의 소음 속에)
아아... 아아.... 안녕하세요......
이것은 정숙이가 사준 녹음기입니다. 연습 많이 하라고 그랬습니다.
치, 난 사실 열심히 연습한단 말야∼
아.아. 사실은... (잠시 생각) 더어 열심히 해야함다.
김,은,주. (소리빽) 잠 좀 그만 자고 정신 좀 차려!!!
(사뭇 점잖게) 이제 맨날 맨날 연습한 걸 녹음하겠습니다.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 삐리리~~~~ 이제 열차가 도착하오니...
뚝 끊기는 녹음기.
흐뭇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는 성현.
웃으면서 다시 녹음기를 돌리는데 갑자기 불이 툭툭 꺼지기 시작한다. 플랫폼을 정리하는 경비원의 발자국 소리만 울린다.
후∼하고 입김을 부는 성현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
 
#49. INT. 책대여점 - 2000년 - DAY(3시경)
돌아가고 있는 녹음기.
카운터 안의 의자에 앉아 테이프를 듣고 있는 은주와 정숙.
은주의 목소리> (소리빽) 잠 좀 그만 자고 정신 좀 차려!!!
(사뭇 점잖게) 이제 맨날 맨날 연습한 걸 녹음하겠습니다.
낄낄대는 은주와 정숙. 만화를 보고 있던 손님들이 짜증스런 시선으로 그들을 째려본다. 눈치를 보며 볼륨을 줄이는 정숙.
정숙 이거 언제..
은주 (조용히 하라는 제스츄어와 함께) 조용히. 여기 좀 들어봐.
성현의 목소리> 안녕하세요, 은주씨.
녹음기는 무사히 은주씨 손에 전달되었나 모르겠네요.
오늘은 전철 안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가세요.
하긴 또 잃어버리면 제가 찾아드리면 되죠 뭐.
은주, TAPE을 또깍 끈다.
정숙 누군데 이렇게 감정이 가득 실린 목소리야?
은주 (쑥스러워 하며) 아니... 뭐.
그 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허겁지겁 전화를 찾는 은주.
사람들 다들 짜증 섞인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은주를 쳐다본다.
여기저기 뒤지다가 바로 옆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찾는 은주.
어쩔 줄 몰라하며 얼른 받는다.
은주 여보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아 네..
정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는 은주. 정숙에게 소리친다.
은주 정숙아! 나... 시트콤 고정이래!
정숙 뭐? 정말? 축하해!
손님들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50. EXT. 교외의 도로 - 2000년 - DAY(4시경)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정숙의 빨간 자동차.
"아아아아-------"하는 소리가 들린다.
창밖으로 고개 내밀고, 소리내고 있는 은주. 옆으로 차들이 휙휙 지나다닌다.
정숙 (은주를 한 대 치며) 야야, 챙피해.
정숙이 윈도우를 지익 올린다. 윈도우에 찡겨지는 은주의 얼굴.
은주 (다급히)
알았어. 알았어. 이제 안할께.
옆으로 지나가던 차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본다. 은주 무안해서 씨익 미소짓고,
은주 정숙아!
정숙이 윈도우를 다시 내려준다.
은주 (똑바로 앉으며)
하아--- 고맙다, 정숙아. 나오니까 너-무 좋다.
자동차 앞 유리에 아주 작은 눈발들이 조금씩 떨어진다.
정숙 눈 오나봐?
은주 응.
(창 밖을 내다보며 그냥 담담하게)
시카고에도 눈이 오려나?
정숙 (눈 오는 풍경을 내다보며) 마지막 눈 같지?
은주 (창문은 다시 열며) 그래. 겨울이 끝나는 거야...
다시 "아아아아아-----" 시원하게 달리는 정숙의 차.
정숙 야!!!!
은주 깔깔깔. (더 크게) 아아아아아-------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은주의 모습. 불안하게 달려가는 빨간 자동차의 모습.
프레임이 반으로 와이프 되면서, 차의 주관적 시점으로 또 다른 차가 달리고 있다.
동일한 도로를 달리는 성현의 차.
와이프 되면서 빨간 자동차가 사라지고 성현의 차만 보인다.
 
#51. INT. 성현의 차 안 - 1998년 - DAY(아침 9시경)
흐뭇한 얼굴로 운전하고 있는 성현. 공사장으로 향하는 듯.
은주소리>(발랄하게)
녹음기는 잘 받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래서요....
성현 고개를 돌려 옆좌석을 힐끗 본다.
옆좌석에는 뜯겨져 있는 포장지가 보인다. 얼핏 보이는 털 귀마개.
차가 잠시 신호등에 멈추자, 포장 안에 들어있는 귀마개를 꺼내는 성현.
은주소리>
일하시는 데 따뜻하실 거예요.
참, 근데 성현씨도 제게 부탁할 거 있으면 언제든지 하세요∼∼
차안의 백미러를 보며 귀마개를 대보는 성현. 웃고 있다.
 
#52. INT. 은주집 - 2000년 - DAY
햇빛이 들어오는 은주집의 창가에 앉아 햇빛을 쬐고 있는 은주와 콜라의 뒷모습.
아주 한가하고 고요하고 편안해 보인다.
은주, 가만히 앉아서 피식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카메라 다가가 보면 이어폰을 콜라와 한쪽씩 나눠 끼우고 앉아있는 은주.
씨익 웃음을 짓고 있다. 콜라도 이어폰에서 들리는 소리에 열중을 하는 듯한 표정.
녹음기를 다시 감아서, 또 듣고, 또 듣고. 계속 씨익 웃음을 짓는 은주.
은주 손에 꼭 쥐어져있는 녹음기.
 
 
#53. EXT. 도로공사장 사무소 앞 철책 - 1998년 - DAY(오후4시경)
멀리서 먼지를 내며 오는 덤프 트럭.
재혁이 철책 앞에 서 있다. 트럭이 사무소 앞에 서면 성현이 내린다.
성현 (내리며) 감사합니다.
(재혁에게 궁금하다는 듯이) 웬일이야?
재혁 (희미하게 웃으면서) 얘기할 시간 좀 있냐?
성현 (먼지를 털며) 그래.
재혁, 손에 들고있던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내쉬면서
재혁 (성현을 바라보지 않으며)
너 왜 나한테 말 안 했냐? 나쁜 자식....
..... 한교수님 ..... 어제 .......쓰러지셨다.
성현, 마치 아무 이야기도 못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성현의 표정이 무심하면서도 왠지 어둡게 느껴진다.
성현을 바라보는 재혁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비친다.
말없이 자신의 차를 타고 떠나는 재혁.
성현 홀로 남겨져 있다.
성현 소리> 미안하다.
하지만 7살 된 나와 어머니를 버리고
건축에 미쳐서 미국으로 가버린 그 사람이
20년 만에 교환 교수로 왔을 때.....
난 그 사람을 마주할 수가 없었어......
우리 아버지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고....
 
#54. INT. 포엠 거실 - 1998년 - 해질 녘
어스름 녘. 거의 해가 져 가는 어두운 포엠의 거실. 부엌마저 불이 꺼져있고....
데굴데굴 굴러가는 빈 맥주 캔을 콜라가 따라가고 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비치는 곳에 앉아 있는 성현.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
배고픈 듯 낑낑거리던 콜라가 한쪽에 포개져있는 사발면 그릇을 킁킁거린다.
쓰러지는 사발면 더미, 콜라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지만 동요하지 않는 성현.
 
 
 
#55. INT. 성우실 복도 - 2000년 - DAY
성우실 앞 복도를 왔다갔다하며 조금 부산하게 보이는 은주.
한 손에 대본을 들고 조금 급한 듯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다.
성현소리>
한석진 교수................. 여전히 활동하고 있겠지요?
은주 부천 뮤직홀 설계한 분이래.
그래... 한, 석, 진 교수. 어?
알게 되면 빨리 전화해 줘! ..... 그래...
녹음실 안에서 "김은주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은주 (녹음실에 대고) 네!
(전화에 대고) 그럼 부탁해, 끊어!
후다닥 녹음실에 들어가는 은주.
 
#56. INT. 교보 문고 - 2000년 - DAY
넓게 펼쳐져 있는 서점의 매장 모습.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은주의 모습이 보인다.
친구 소리>
니가 말한 그 교수, 지금 뭐 하는 진 잘 모르겠고.. 굉장히 유명하긴 하다니까 아마...
은주, 미로처럼 보이는 서점의 매장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건축" 이라고 쓰여져 있는 진열장 앞에 도착한 은주. 휴~ 하고 숨을 가다듬는다.
쭉 책 제목을 살펴보는 은주.
"저자 한석진" 이라고 쓰여진 책들 몇 권을 발견하고 급히 꺼낸다.
그 중 굵고 분명한 글씨로 <건축가 한석진 유고집>이라고 쓰여진 책을 발견하는 은주.
서둘러 <유고집>을 꺼내느라 손에 들고 있는 다른 책들을 놓친다.
책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다. 쳐다보는 사람들.
주위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급히 책에 펼치는 은주.
<유고집>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다가 뭔가를 발견한 듯 굳어지는 은주의 표정.
 
#57. EXT. 서점 앞 거리 - 2000년 - 해질 녘 (오후 5시경)
이어폰을 꽂고 한 손에는 책봉투를 든 채 거리를 걷고 있는 은주.
멀리서 달려오는 차. 생각에 빠져서 못 보고 계속 걷는 은주.
경적을 마구 울리는 차.
바로 눈앞에서야 오는 차를 발견하고 놀라는 은주.
간발의 차이로 은주 앞에 서는 차.
운전자 뭐야? 죽으려고 환장했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있는 은주.
멍하니 녹음기를 쳐다본다.
 
#58.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책상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은주.
한참 생각하는 듯 하더니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쥔다. 책상 위에 놓여진 책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식으로 침대에 가서
누워버리는 은주.
이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벌떡 일어나 다시 책상에 앉는다.
편지지를 한 장 꺼내 뭔가를 쓰려다가 다시 지우는 은주. 한 숨을 한 번 휴 쉬고는
바닥에 졸고 있던 콜라를 들어 올려 무릎에 두고 쓰다듬는다.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잠시 멍하니 있는 은주.
후~ 하고 숨을 내쉬고 종이를 펼쳐 결심한 듯 무언가 시작한다.
 
#59. INT. 장례식장 - 1998년 - NIGHT
은주 소리>
한석진 교수님은................ 잘 있으신 것 같아요.
카메라 앞을 휙 휙 지나치는 사람들.
부산한 장례식장의 풍경. 술에 취한 상객들이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화투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한 쪽 장례식장에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재혁이 문상 온 사람들을 안내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어디선가는 곡소리가 울려 퍼진다.
학생들이 감싸고 있는 한 장례식장 모습 속에 한석진 교수의 영정 사진이 보인다.
음식을 나르는 상복을 입은 아줌마들(성현의 친척들)이 무언가 쑥덕이면서 이야기를 한다.
성현이 앉아 있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현의 이모.
왁자지껄한 학생들 사이에 묻혀 있는 성현, 여느 학생들처럼 술을 마시며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웃고 있다.
 
#60. EXT. 포엠 앞 길 - 1998년 - 새벽 (동틀 무렵)
검은 양복을 입은 채, 밤을 세웠는지 초췌한 얼굴의 성현이 포엠 앞길을 걸어오고 있다.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여전히 무표정한 성현의 얼굴.
고요한 풍경 속에, 갑자기 무언가 폭발하는 듯 달리기 시작하는 성현.
모든 것을 쏟아 내 버리기라도 할 듯하다.
성현 소리>
왜 말해 주지 않은 거죠?
헉헉거리며 달려 포엠 앞에 도착한 성현,
멈추자마자 포엠 앞에 달려 있는 전등을 주먹으로 친다.
깨지는 전등. 어스름 속에 켜져 있던 노란 불빛이 꺼져버린다.
계속 숨을 몰아 쉬며 눈을 감고 있는 성현. 감겨진 눈에 약간 눈물이 고이는 듯하다.
그대로 그 자리의 울타리에 기대어 무너지듯 앉는 성현.
한 참 그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멀리 보인다.
#61. EXT. 포엠 앞 - 2000년 - DAY
마치 이전 씬의 성현이 앉아 있던 자리로 다가가듯이 터벅터벅 포엠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은주의 뒷모습. 우편함 앞까지 가면 성현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물론 아무도 없다.
우편함 앞에 멈춰 서는 은주.
우편함 속 시점
우편함이 열리면 은주의 눈이 보인다. 눈동자가 우편함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우편함. 은주의 표정은 실망스러운 빛을 띄고...
다시 툭 닫히는 우편함. 암흑.
 
#62. INT. 녹음실 - 2000년 - DAY
카메라 앞을 가려 암흑이었던 녹음실의 문이 밀려 열리면 은주 뒷모습이 Fr. in 하여 녹음실 안으로 들어간다.
추운 듯 손을 비비며,
은주 안녕하세요?
PD (대본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왔어?
목도리를 풀며 너스레를 떠는 은주.
은주 아후~ 바람이 차요. 그쵸.
PD (은주를 힐끗 보며)
따뜻한 물 좀 마셔둬요. 오래 녹음해야 되는데,
목 잠기면 큰일이니까.
은주 네.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물을 컵에 따르는 은주. 김이 모락~
양손으로 컵을 쥐고 '호~' 부는 은주의 얼굴에 살짝 쓸쓸함이 비친다.
 
#63. EXT. 거리 - 2000년 - DAY(오후 4시경)
날씨가 무척 추운 듯, 붕어빵 장수 리어카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몸을 움츠리고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은주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멍하니 터벅터벅 걷고 있다.
붕어빵 장수에게 시선이 가자 지나치려다 멈춰서는 은주.
붕어빵 아저씨가 성현이에게 보낸 것과 같은 토끼털 귀마개를 쓰고 있다.
은주 (아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저씨, 그거 따뜻하죠?
붕어빵을 틀에 짜 넣으며 그냥 피식 웃는 아저씨.
은주가 멍청히 아저씨를 보며 서 있자 아저씨, 조금 멋쩍은 듯 웃으며
아저씨 붕어빵 드려요?
은주,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 듯
은주 아, 아니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가던 방향으로 가는 은주, 가다가 다시 한 번 붕어빵 아저씨를 한 번 돌아본다. 털 귀마개가 유독 눈에 띄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붕어빵 가판대.
잠시 후 사람들에 묻혀 사라져 가는 은주의 뒷모습.
 
#64.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나무 상자 안에 넣어지는 성현의 편지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성현의 편지들.
은주, 편지들을 하나 하나 다시 읽어보면서 작은 상자에 차곡차곡 집어넣는다.
쓸쓸한 표정의 은주.
편지를 다 넣고 나자 상자를 덮고, 책상 위에 놓여진 <한석진 유작집>을 가만히 바라본다.
후∼ 하고 한숨을 쉬더니 서랍을 열어 가위와 풀을 꺼내던 은주, 잡동사니들 사이로 지훈의 사진이 담겨진 액자가 보인다. 활짝 웃고 있는 지훈의
얼굴.
지훈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주, 서랍을 탁 닫는다.
닫혀진 서랍이 반동으로 다시 서서히 열린다. 서랍 안에 있는 지훈의 사진.
은주,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
 
#65. INT. POEM - 1998년 - NIGHT
포장된 소포꾸러미와 그 위에 놓여 있는 여러 통의 은주의 편지.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는 초췌해진 성현의 얼굴.
책상에 놓여 있는 소포를 들어 천천히 뜯어보는 성현.
한석진 유작집이다.
한두 번 기침을 하며 유작집을 펼쳐보는 성현.
흰 여백 위에 조그맣게 쓰여진 글귀.
INSERT '고독과의 친밀함 속에서만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
이 집은 그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완성한 것으로
도시적 외경을, 바다라는 자연 환경 속에서 구현해내는
생전의 한석진 교수의 작품 경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성현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 변화.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다가, POEM의 도면에서 손이 멈춘다. POEM의 평면도..
잠시 천장을 바라보는 멍한 성현의 얼굴에 슬픔의 그림자가 감돈다.
은주 소리>
(가라앉은 듯 한 목소리로)
며칠 전에 사고가 날 뻔했어요.
 
#66. 몽타쥬 - 2000년
은주집, NIGHT
바닥에 엎드려 누워 있는 은주. 머리맡에 있는 녹음기를 작동해 본다.
은주 소리>
성현씨가 찾아준 녹음기를 듣다가 차가 오는 걸 미쳐 못 봤거든요.
성우실, DAY
녹음실에서 다른 여러 성우들과 함께 더빙을 하고 있는 은주
은주 소리>
우리가 주고받는 것들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워졌던 것 같아요.............
 
은주집, 오후4시경
밥을 먹고 있는 콜라. 턱을 양손으로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은주 모습.
은주소리>
정말 미안해요..... 성현씨....
책대여점, 오후4시경
만화책을 비닐 봉투에 넣어 꼬마에게 건네는 은주. 알사탕 한 개를 꼬마의 손에 쥐어주자 꼬마, 고개를 꾸벅하고는 신나서 달려나간다
은주소리> 사랑은......... 때로는 감춰져 있지만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내요...
아버지는 성현씨를 사랑했어요....
은주집, 해질 녘
콜라는 새근새근 자고 있다.
창가를 내다보며 김이 나는 커피를 들고 해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은주의 모습.
 
#67. EXT. 한교수 무덤가 - 1998년 - 해질 녘
잘 정돈된 공원묘지.
일렬로 늘어서 있는 비석들이 보이고, 성현이 앉아 있는 모습이 롱샷으로 보여진다.
스케치를 하고 있는 성현의 모습.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무덤가에 놓여지는 한교수의 얼굴을 담은 스케치.
 
#68. INT. 포엠 작업실 - 1998년 - NIGHT
구석진 방에 쌓여있던, 박스와 제도대.
성현이 들어와 제도대를 덮고 있던 커버를 풀고 벗겨낸다.
박스에 담겨있는 도구들을 세팅하는 성현.
자리에 앉아 로트링 펜으로 살짝 그어 보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잉크가 잘나오지 않는다.
펜으로 빈 종이 위를 톡톡 쳐본다. 얕은 한숨을 짓는 성현.
 
#69. EXT. 지하철 벤치 - 1998년 - NIGHT
열차가 강한 소음과 함께 지하철역을 빠져나가고 있다.
은주가 녹음기를 놓고 간 그 벤치..... 달리는 열차 뒤로 슬쩍 슬쩍 보이고.....
열차가 빠져나가자 그 벤치에 멍하게 앉아 있는 성현.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두 발을 쭉 뻗은 채,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또깍 또깍... 발걸음. 누군가가 성현의 옆에 앉는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는 성현. 은주다!
눈이 커지는 성현의 얼굴. 초긴장 된다.
목도리에 고개를 파묻으며 추운 듯 발박자를 구르는 은주.
성현, 은주를 차마 돌아보지는 못하면서
천천히 주머니 속에 잡히는 물건, 귀마개를 꺼내 본다.
귀마개를 만지작거리는 성현. 불안함과 떨림.
은주, 자리에서 일어나 플랫폼 한켠에서 좌판을 펼쳐 놓고 장갑을 파는 상인에게로 간다.
장갑들을 구경하는 은주. 그 중 하나의 장갑을 골라 들고 망설이는 듯하다.
성현, 바라보고 있다가 일어나서 은주 곁으로 다가간다.
은주 근처에 서서 곁눈질하는 성현, 조심스럽게 귀마개를 한 번 써본다.
귀마개를 쓴 성현의 모습이 귀엽다.
성현, 귀마개를 쓴 채로 은주의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힐끔 본다.
은주의 아무것도 모르는 무심한 얼굴.
주변이 모두 고요해지면서...... 성현에게는 은주의 존재만이 각인되어 있다.
은주에게 집중되어 있는 성현. 시간이 멈춘 듯이...
이 때 갑자기 정적을 깨는 듯이 들려오는 소리.
지하철 안내방송> 띠르르~ 지금 열차가 도착하오니.........
은주 장갑을 들고 더욱 갈등한다. 살까 말까....
다급해지는 성현의 얼굴, 망설이며 뭔가 말을 걸려는 듯..
빠앙~ 열차가 들어오는 불빛.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열차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린다.
장갑을 그냥 내려놓고 재빨리 열차로 달려가는 은주.
은주의 뒤쪽으로 다가가는 성현.
갑자기 고개를 돌린 은주와 눈이 마주친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얼굴이 붉어지는 성현. 어색하게 딴 곳을 바라본다.
슬그머니 다시 은주를 쳐다보자 자신을 보고 쿡 하며 웃고 있는 은주. 이미 열차에 타 있다.
더욱 당황하는 성현.
'아차' 하고 열차에 타려는 순간. 문이 닫혀버리는 열차. 천천히 출발을 하고....
안타까운 표정의 성현.
열차가 강한 소음과 함께 지하철역을 빠져나가고 있다. 성현, 망연히 서 있다.
상인(o.s) 그 아가씨도 참, 싸게 준다는데.....
은주가 사려던 장갑을 들고 투덜거리고 있는 상인의 모습이 보인다.
성현, 상인이 들고 있는 장갑을 가만히 바라 본다.
뭔가 생각하는 성현.
성현 소리> 오늘 전철역에서 은주씨를 봤어요.
 
#70. INT. 전철안 - 2000년 - DAY
.
덜커덩, 덜커덩~
어두운 지하를 달리고 있는 전철.
손잡이를 잡고 서서 까만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는 은주.
쓸쓸함이 얼굴에 베어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성현 소리> 그래요.... 아버지의 죽음을 미리 알게 되서 찾아갔다 해도
저는 진실로 아버지와 만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71. EXT. 포엠 앞 - 2000년 - DAY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편함을 열어보는 은주.
편지가 있다. 은주, 기대에 차서 편지를 꺼내 본다.
성현 소리> 은주씨가 보내준 아버지의 유작집을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고독을 알게 해준 그 후에 사랑을 알게 해준 아바지께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을 알게 해준 은주씨께도....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인간이 갖는 가장 선한 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은주씨는 착한 사람이에요.. 오히려 제가 미안해요.
편지와 함께 포장을 열면 97년도 은주가 사려고 망설이던 그 장갑이 함께 들어 있다.
은주, 표정이 밝아 진다.
장갑을 꺼내 손에 끼어 보고 요리조리 살펴 본다.
장갑으로 얼굴을 감싸보는 은주.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은주의 얼굴.
밝은 미소.
은주 소리> 우린 둘 다 너무 쓸쓸하게 지내온 것 같아요......
성현씨, 혹시................... 시간 있으세요?
 
 
 
#72. EXT. 월미도 놀이동산 - 1998년/2000년 - DAY
음악 계속되면서...
파란 하늘, 따스하게 드리워진 햇살 속에서 성현이 놀이동산이 낯선 듯 두리번거리고 있다.
은주 소리>
우선 편의점에 들어가세요. 그리고 맥주를 하나 집는 거예요.
맥주를 들고 나오는 성현.
똑같은 장소에서 맥주를 들고 나오는 은주.
은주 소리>
아주 아주 시원하게 마신 다음....
맥주를 소리나게 탁 딴 다음, 맥주를 들이키는 성현.
맥주를 한 번에 다 마셨는지 숨이 찬 듯 카∼ 하며, 맥주 캔에서 입을 떼는 은주.
은주 소리>
자∼ 이제 정신 없이 뛰어야 해요∼
환하게 웃으며 달리는 두 사람. 주변사람들이 이상한 듯 쳐다보지만.
은주 소리>
바이킹 타는 걸 놓치면 안 되거든요!!!
심장이 마구 뛸 때 타는 게 제일 좋아요.
열심히 달려 온 듯 숨을 헉헉거리며 바이킹에 올라타는 성현과 은주.
사람이 얼마 없는 바이킹에 둘 다 옆자리는 비워둔 채로....
천천히 바이킹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프레임 아래에서 위로 수∼욱 올라오는 바이킹.
성현의 모습이 얼어붙어 있다.
은주 소리>
이 순간이 바로 !
다시 바이킹이 프레임 아래에서 올라오면
이번에 은주의 모습. 신난다! 아---- 하며 손을 드는 은주.
위 아래로 움직이며 속도를 더하는 바이킹.
성현, 조금씩 바이킹을 즐기기 시작하는 듯 표정이 밝아진다.
바이킹 위의 성현과 은주의 밝은 모습이 서로 컷백된다.
#73. EXT. 버스 정류장 - 1998년/2000년 - DAY (3시경)
성현 소리>
이번엔 제가 멋진 곳을 안내해 드릴께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성현. 옆에는 어떤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있다.
성현 소리>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XX로 가는 버스를 타세요.
프레임 안으로 버스가 들어와 선다.
버스에 가려 성현과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화면 속에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미묘한 변화 (버스가 녹슬고 낡은 모습으로 변하고 주변의
모습이 조금은 세월의 때를 느끼게 하는) 가 생긴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려하자 은주가 뛰어와 버스를 잡는다.
은주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면 벤치엔 할머니 대신 꼬맹이들이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74. EXT. 가로수 길 - 1998년/2000년 - DAY (4시경)
해질 녘의 오렌지 빛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가로수가 양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길.
버스가 서면 성현이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버스가 출발하면 내린 은주의 모습이 보인다.
성현 소리>
버스에서 내리면 가로수가 하늘을 덮은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로수를 스치며 걷는 성현을 카메라가 트랙킹으로 따라가며 보여주고,
성현이 오른쪽으로 프레임 아웃 하면 다시 세월의 변화를 암시하는 아주 미묘한 변화 (가로수의 나뭇가지들이 조금 자라거나 하는) 가 생기며 은주가
오른쪽에서 프레임 인되어 보여진다. 가로수 길의 아름다움에 취한 은주의 행복한 표정.
 
#75. INT. 전원카페 - 1998년/2000년 - 해질 녘 → 밤
목조 분위기의 옛스러워 보이는 카페.
천장에 커다란 원형 램프들이 아름답게 달려 있다.
카페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성현.
깔끔하고 푸근한 인상의 주인 아저씨가 성현을 맞아 자리로 안내한다.
자리에 앉아 주문하는 성현.
성현 소리>
칵테일이 맛있는 이 카페에 들어오면 전 항상 같은 자리에 앉죠.
내부 인테리어의 변화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카페 안.
성현과 같은 자리에 역시 아주 미묘한 변화(톤이라든가)가 느껴지며 은주가 앉고,
그녀의 앞에 성현이 주문한 것과 같은 칵테일을 내놓는 주인 아저씨.
전보다 머리가 희끗해지고 수염을 기르고 배가 좀 나왔지만 여전히 푸근한 인상이다.
한 모금 마시고 맛을 음미하는 성현.
한 모금 살짝 마셔보고선 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은주.
성현 소리>
이 카페에서는 연주와 노래를 즐길 수 있어요. 은주씨도 좋아하실 거예요.
카페에 마련된 무대에 주인 아저씨가 올라가 기타를 집는다.
주인아저씨, 올드 팝 한 곡을 다른 밴드 멤버들과 멋들어지게 연주한다.
은주의 카페에는 역시 나이를 조금 먹은 밴드 멤버들 (한두 명 정도는 다른 사람에 다른 악기 편성으로)이 올라와 같은 곡을 연주하고, 한
무명가수가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성현 쪽 밴드가 보여주는 연주 한 소절이 끝나면,
은주 쪽 밴드가 뒷 소절을 연주하며 노래는 계속되는 가운데....
푸근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 성현. 하지만 조금씩 표정이 어두워진다.
역시 다소 쓸쓸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 은주.
성현 소리>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은주씨는 어땠나요?
은주 소리>
고마워요.... 정말 즐거웠어요.
 
#76. EXT. 도심 거리 - 1998년/2000년 - NIGHT
빵빵∼ 하며 휙 지나가는 자동차. 자동차가 지나가고 나면 보이는 성현의 모습.
복잡한 도심의 거리를 홀로 걸어가고 있다. 앞 씬에서 나왔던 노래를 휘파람으로 조용히 흥얼거리면서 걷고 있다.
성현 지나가고 나면 동일한 거리에서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는 은주.
복잡한 도심의 풍경 속에 멍하니 무슨 생각인가를 하면서 걷다가 마주 오던 남녀와 툭 부딪힌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은주. 남녀는 지나가고 은주,
멍청히 뒤를 돌아보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은주의 시점처럼 보이는 거리의 풍경 속에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성현의 모습,
(마치 동일한 공간에 두 사람이 스쳐지나갔던 것처럼 느껴진다.)
성현의 휘파람 소리가 잠시 들렸다, 사라진다.
성현의 모습도 focus out되며 사라져 가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은주, 차가운 바람이 은주의 머리에 스친다.
 
#77. INT. POEM 작업실 - 1998년 - DAY(오후 2시경)
작업실에서 무엇인가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성현.
잘 되지 않는 듯, 그리던 종이를 구겨 버린다.
새하얀 종이에 다시 그리기를 시작하는 성현.
그리던 도중 다시 구겨 던져버리는 성현. 졸고있던 콜라가 깨어나 성현을 본다.
지친 듯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본다. 담배를 꺼내 무는 성현.
다시 새 종이를 꺼내 스케치를 시작한다.
 
#78.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편지를 들고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주.
편지를 내려놓고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는 듯 하더니 조금 미소를 짓는다.
성현 소리>.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건가요?
콜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은주를 바라보고 있다.
콜라와 눈이 마주치는 은주, 갑자기 콜라에게 다가가 콜라의 머리를 잡고 흔들며
은주 그냥 한번 보자는 건데 뭐∼
은주, 콜라를 흔들다 놓고 후다닥 프레임 아웃 한다.
졸지에 남겨진 콜라만 어질어질∼
#79. INT. 포엠 침실 - 1998년 - NIGHT
책상에 앉아 진지하게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성현.
모니터엔 전자 달력이 보이고, 날짜를 뒤로 뒤로... 검색하면, 2000년 3월 20일.
성현 토.. 요일..
의자 뒤로 푹 기대어, 두 손을 머리 뒤로하고 빙긋이 웃는 성현.
은주소리>
제주도로 오세요. 제 고향에 아름다운 바닷가가 있어요.
거기다 집을 짓는다면 정말 예쁠 거예요.
음...... 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바다와 만나는 그런 집이요.
집에서부터 맨발로 걸어나가면 모래가 사박사박 밟히는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성현, 스케치북을 집어 든다.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지는 바닷가 풍경. 바닷가 위에 집을 스케치하는 성현.
 
#80. EXT. 제주도, 은주의 집 - 2000년 - DAY
돌로 된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예쁘게 지어진 아담한 이층집이 보인다.
집 안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은주. 혜기를 앞에 태운다.
은주 다녀오겠습니다.
혜기 (은주와 동일한 톤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은주 어머니, 어서 가보라는 식으로 손을 흔든다.
밝은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 은주.
 
#81. EXT. 제주도, 바닷가 - 2000년 - DAY
즐겁게 달려오는 자전거. 은주 갑자기 무언가 발견한 듯 정지.
자전거를 세우자 폴짝 뛰어내리는 혜기.
바닷가로 향하는 혜기를 뒤로 한 채 시선이 가는 쪽으로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은주.
이제 막 기초가 올라가고 있는 건물이다.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작업용 테이블 위에 올려진 투시도를 발견한다.
잔뜩 쌓여있는 설계도 밑에 깔린 투시도. 주의 깊게 투시도를 들여다보는 은주.
그 때 뒤에서 누군가 나타난다. "저...." 돌아보는 은주. 재혁이 서 있다.
은주, (성현이 아닐까 해서) 조금 당황한다. 낯설게 쳐다보는 재혁.
한동안 멍하니 서있는 두 사람.
재혁 무슨 일로 ... 누구 ...찾으세요?
은주, 아니구나, 하는 표정.
은주 아, 아니요. 그냥... 이 그림이요.
(손짓해가며) 어쩐지 낯익은 그림 같애서요.
...안 그래도 이 근처에 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거든요.
재혁 네..... (담배를 꺼내며 혼잣말처럼) 제주도 참 좋네요.
은주 여기 분.. 아니신가봐요.
재혁 네. 공사 때문에 왔어요.
은주 네.... 이 집, 직접 지으세요?
재혁 공사만 내가 해요. ...친구가 설계한 집이예요.
이 곳이랑 잘 어울릴 거 같죠. ...
(미소를 띠며)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설계한 집이거든요....
은주 (역시 미소를 띠며) 네.....
두 사람, 정적이 흐르자 조금 어색해 진다.
재혁 (웃으며) 제가 쓸데없이 말이 많네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그럼....
은주, 따라서 꾸벅 인사한다. 괜히 어색해서 멀리 바닷가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 은주.
은주 혜기야!
은주, 놀고 있는 혜기에게로 걸어간다.
시간 경과
혜기가 짜증을 내는 모습이 보인다. 집에 가자고 조르는 혜기를 달래며, 이젠 약간 초조해 지는 은주. 시계를 자꾸 들여다본다. 결국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는 은주.
은주 그래, 가자.
 
#82. EXT. 제주도, 거리 - 2000년 - DAY
혜기와 걸어가다가 주춤 주춤 멈춰서는 은주.
은주 (조심스럽게)
혜기야, 혼자 들어갈 수 있지? 고모도 금방 들어갈께.
혜기의 의아한 표정.
가까운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나오는 은주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스크림을 혜기 손에 들려서 들여보내는 은주.
 
#83. EXT. 제주도, 바닷가 - 2000년 - EVENING
백사장에 홀로 뒷모습으로 앉아 있는 은주.
카메라 아주 느리게 서서히 round tracking ...
화면은 낮에서 서서히 불길한 피 빛으로 짙어지는 노을로 바뀐다.
마침내 카메라는 앉아있는 은주의 정면 얼굴을 잡는다.
쓸쓸함과 불길함이 뒤섞인 은주의 표정.
 
#84. EXT. 제주도, 은주의 집 마당 - 2000년 - NIGHT
방안에서는 오손도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듯한 가족들의 소리.
은주 소리>
한참을 기다렸어요.
툇마루에 앉아있는 은주. 괜히 발장난을 쳐본다.
은주 소리>
왜 안 왔는지 안 물어볼께요.
2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나보죠.
 
#85. INT. POEM 침실 - 1998년 - NIGHT
은주 소리>
그래서 저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거겠죠...............
스탠드 조명만 약하게 켜져 있는 침실. TV에서 <달려라 하니>가 나오고 있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성현. 생각에 빠진 듯한 성현의 표정.
아무도 보지 않는 TV는 계속 진행되고, 은주의 깔깔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86. INT. 공항, 제주 - 1998년 - DAY
북적거리는 신혼 여행객들, 관광객들의 모습.
요란하게 안내 멘트들이 들려오는 가운데 성현이 안내 프론트로 걸어간다.
안내요원 앞에 선 성현.
성현 성산포에 가려고 하는데요.
 
#87. EXT. 제주도 - 1998년 - DAY
혜기(5살)가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가 아니라 이쪽으루~~ 어~~엉~"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는 지 짜증스러운 목소리이다.
아이로부터 좀 떨어진 곳엔 성현이 앉아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성현. 성현 앞에 소라껍질이 하나 놓여있다.
은주소리>
(웃음이 섞여있다) 소라 껍질 안에 천사가 잠을 자고 있다는 거예요.
성현이 소라고동을 주워서는 눈을 감고 귀에 가만히 대본다.
정말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가만히 미소를 짓는다.
그 때, 발에 무언가 느껴져 눈을 뜨는 성현. 발 앞에서 멈춰 서 있는 바닷게 한 마리.
바닷게 옆으로는 꼬마아이가 얼굴을 들고 성현을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다.
혜기다. 성현이 혜기에게 따뜻하게 웃어 보인다.
혜기 아저씨 뭐해요?
성현 (무안한 듯) 으~~응. 너도 한번 들어볼래?
혜기의 귀에 소라껍질을 대주는 성현. 혜기는 역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소라껍질에 귀를 기울인다.
성현 무슨 소리가 들리지.
혜기 슈~~우~ㄱ
성현 그래. 천사가 잠자는 소리야.
혜기 천사가 잠자는 소리요? 천사가 잠을 자요?
다시요. 다시 해 줘봐요. 아저씨.
성현이가 혜기에게 소라고동을 준다. 다시 귀에 갖다대는 혜기. 이번에는 혜기가 소라껍질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야~~ 일어나 봐~~~
천사야~~"
혜기 소리 작아지면서 두 사람을 잡고 있던 카메라가 뒤로 빠지고,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있는 성현과 혜기의 모습이 한가롭게 보인다.
멀리서 혜기를 부르는 혜기 엄마 목소리. 혜기는 아랑곳 않고, 소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성현의 발 밑을 벗어난 바닷게가 쫄쫄쫄쫄.
이제야 혜기의 괴롭힘에서 해방된 듯 열심히 그들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
 
#88. EXT. 건널목 - 2000년 - EVENING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인 듯 가방을 들고 이어폰을 꽂은 채인 은주.
뭔가 혼자 생각하는 듯한 은주의 표정.
신호등이 빨간 불에서 파란 불로 바뀌자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한다.
은주, 멍하니 서 있다가 어느새 불이 바뀌고 혼자 서 있음을 깨닫고 급히 길을 건넌다.
이 때 지훈과 한 여자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로 지나가는 것을 얼핏 본 것 같은 은주. 신호등은 깜박이고 어느새 저만치 가는 듯 싶더니 사람들
틈에 묻혀서 사라져버린다.
은주, 지훈이 사라져간 방향을 보고 멍하니 서 있다.
사람들이 은주의 앞을 휙 휙 지나쳐 간다.
 
#89. INT. 책 대여점 - 2000년 - EVENING → NIGHT
위씬과 동일 한 앵글로 멍한 표정의 은주.
은주의 얼굴로 피어 올라오는 하얀 김.
정숙(o.s) (다정하게) 배 고팠지?
은주, 돌아보면 냄비 안에 막 끓인 라면이 맛있어 보인다.
정숙, 젓가락을 딱 소리나게 갈라서 은주의 손에 쥐어 준다.
은주, 냄비에서 라면 한 가닥을 호로록 먹는다. 놓여진 접시의 단무지를 하나 집으며,
은주 김치는 다 먹었니?
정숙 그럼, 그게 언젠데...
은주 (단무지를 넘기다가 멍하니) 참.... 쓸쓸한가봐.
아까 길에서 어떤 남자를 봤는데.... 지훈씬 줄 알았어...
정숙 (냄비 뚜껑에 라면을 가득 덜어 입어 넣으며)
그러게... 소문도 없이 들어와서 결혼까지 한다니, 대단하지.
말을 마치자 마자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은주를 바라보는 정숙..
은주, 갑자기 사래가 들려 기침을 콜록 콜록... 한다.
정숙, 휴지를 갖다 주고 물을 주며 수선스럽게 움직인다.
은주는 계속 콜록 콜록....
정숙 (앉으며) 사실은, 주연이한테서 전화 왔었어. 너 알고 있냐고....
은주, 휴지로 코를 푼다.
은주 (사래들린 목소리로) 어떻해... 라면에 코 빠졌어...
은주 기침에, 눈물에, 우는지 웃는지.....
시간경과 - NIGHT
카운터 주변만 조그맣게 밝혀져 있다. 콜라는 어둠 속에서 새근 새근 자고 있다.
은주와 정숙의 앞 테이블에 치킨을 먹고 남은 흔적들이 널려 있다.
맥주 캔을 앞에 두고, 정숙이 이야기에 열중해 있다.
꽤 많이 마신 듯 두 사람 다 목소리가 크다.
정숙, 만화책을 펴서 한 손에 들고, 은주를 약올리는 표정으로
정숙 그래서, 맨 마지막에 누굴 택했냐면 말야,
은주 (귀를 꼭 막고있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나, 볼꺼란 말야!!
정숙 (약올리듯) 결국, 누구랑 됐냐면....
은주 (여전히 귀를 막고) 안... 돼.....!!
정숙 그 옷 있잖아.... 그 옷 주머니 속에다가 남자가 편지를 남겼어.
은주 (귀에서 손을 떼며) 헤! 그럼, 그 편지에 고백을 한거야?
정숙 그렇지∼ 편지에 뭐라고 썼냐면....
은주 (기대에 차서) 뭐라고?
정숙 (마치 성우처럼 목소리에 멋을 내서) "당신만을, 사, 랑, 합니다."
은주 (감동에 겨운 표정으로) 와∼∼ 너무 ....
정숙 (신나서) 너무 좋지?
은주 너무.... (의외로 기운이 빠지며) 너무....
슬, 프, 다......
정숙 (의아해서) 왜? 너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구 난리였잖아.
은주 하지만....... 그래도.....
(힘없이) 동생도..... 그 남자를 사랑했잖아....
정숙, 할 말이 없다는 듯이... 힘 빠지는 표정이다.
정숙 (누차 말했다는 식으로) 은주야, 쫌만 지나면, 생각도 안날 꺼야.
은주 (고개 푹 숙이고) 그래.....
정숙 (일부러 밝게) 세상에 얼마나 남자가 많은데∼
은주 (한숨)..... 지금도.... 생각 잘 안나....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두들 다 너무 멀리 있어...
정숙 (생각에 잠겨 있다.) ......
(뜬금없이,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쉽게 변해가는∼"
은주, 정숙을 보고 피식 웃는다.
은주 (노래) "슬픔 안은, 슬픔∼ 안은 날∼"
정숙, 은주를 보고, 씩 웃으며 은주와 함께 노래하기 시작한다.
은주, 정숙 "잠이 들고 파∼ (합창, 크게) 변하지 않는 세, 상을 꿈∼꾸∼며∼∼
은주와 정숙,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는다. 다시 한 번 눈을 맞추며, 큰 소리로,
은주, 정숙 "변, 하, 지, 않는, 세, 상을 꿈∼꾸∼며∼∼!!!"
깔깔깔 웃는 은주와 정숙.
은주, 기운을 내는 듯 털고 일어난다.
정숙도 함께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은주 (힘을 내서) 집에 가야겠다. (만화책을 집으며) 이거 나 가져 간다.
정숙 말은 바로 해! 빌려 가는 거지!
은주 치, 짠순이!
정숙 이 언니가 열심히 벌어야 우리 소원을 이루지!
은주 (손가락으로 꼽으며) 1층엔 떡볶이 가게, 카페, 2층엔 만화방, 3층엔.....
정숙 3층엔, 여성 전용 안마방!
은주 (푸하하 웃으며) 남자들은 출입 금지야?
정숙 그럼!
은주 맞아! 남자들은 도움이 안돼!
정숙 이제야 김은주도 정신을 차리는 구나!
은주 집에 가서 두 발 쭉 뻗고 잠이나 푹∼ 자야지!!
정숙 장하다, 김은주!
은주와 정숙,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불 꺼진 책대여점을 나선다.
 
#90.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문 소리 들리고 은주가 짐들을 들고 들어와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앉는다.
짐들을 아무렇게나 던져 두고 가만히 앉아 있는 은주.
멍하니 책상 위에 놓여진 빈 종이를 내려다 본다.
카메라 천천히 뒤로 빠지면서 책상 위에만 밝게 불이 켜져 있는
은주방의 일부가 보인다.
콜라는 방 앞을 왔다 갔다 한다.
잠시 후, 책상에 엎드려 있는 은주의 모습이 보인다.
은주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온다.
 
#91. INT. POEM 침실 - 1998년 - NIGHT
은주의 편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성현.
가방을 침대에 던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편지를 펼친다.
편지 안에서 떨어지는 약도, 날짜 등이 써 있는 종이, 지훈과 은주가 함께 찍은 사진 등.
은주 소리>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점점 표정이 굳어지는 성현.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은주 소리>
그 사람하고의 관계는 항상 기다림의 연속이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어요.
열려진 문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콜라. 조르르 달려와 성현의 양말을 물어 당긴다.
은주 소리>
그냥 그 사람이 제 곁에 있을 수 있게, 지훈씨를 떠나보내지 않게 날 도와줘요.
반응이 없는 성현을 한번 올려다보고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콜라.
은주 소리>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콜라가 낑낑대며 소파 한 귀퉁이를 물어뜯고 있다.
성현이 맥없이 콜라를 당겨 안는다.
성현 (멍한 표정) 그러지 마. 나중에 은주씨가 살게될 집이야.
성현 앞으로 편지가 떨어져 있고 콜라가 성현의 품에서 벗어나 편지의 냄새를 킁킁 맡고 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밤 풍경이 쓸쓸하다.
 
#92. INT. 술집 - 1998년 - NIGHT
낡은 대포집 분위기의 인적 없고 조용한 술집. 전구 몇 개로 밝혀져 있다.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 몇 병, 순대볶음이 식어서 굳어 있다.
완전히 풀어진 재혁.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한다. 둘 다 술이 거하게 취한 분위기.
재혁 너 입이 붙었냐? 왜 아무 말이 없어 임마.
성현 .........
재혁 여자야?
술을 들이키는 성현. 재혁이 성현을 말린다.
재혁 야, 너 너무 마신다.
성현 .........
재혁 갈 사람 같으면 보내 임마.
성현 그래야 겠지.
재혁 맞구나. 여자 맞구나. (갑자기 흥분하는 재혁) 누군데?
성현 ... 좋은 여자.
재혁 말해봐. 어떻게 만났는데.
성현 ... (힘겹게 웃으며) 좋은 인연으로.
무언가 생각에 빠지는 성현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재혁.
한동안 그렇게 있는 두 사람. 갑자기 일어서는 성현.
재혁 (성현이를 잡으려고 어정쩡 일어서다 놓치며)
야야야.
(성현의 뒤를 따라간다) 왜 말을 하다 말어.
이미 성현이는 계산대로 가고 있다.
 
#93. EXT. 술집 앞 -1998년 - NIGHT
성현이 술집을 나선다. 재혁이 뒤따라 나온다.
혼자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가버리는 성현. 발걸음이 빠르다.
따라가다가 멈춰 서서 '저게...'하는 황당한 표정을 하는 재혁.
 
#94. EXT. 지하철 벤치 - 1998년 - NIGHT
성현, 숨이 찬 듯 지하철의 플랫폼으로 올라온다.
은주와 만났던 그 벤치.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성현, 그 옆에 털썩 앉는다.
숨을 크게 한번 몰아쉬는 성현. 입김이 하얗게 나온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성현. 사람들로 복잡하다.
아직 술이 덜 깬 듯 눈살을 찌푸리는 성현.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여자의 모습, 은주다!
은주가 성현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쉬는 성현.
천천히 일어난다. 미소짓는 은주.
성현이 은주에게로 다가간다.
성현을 지나치는 은주. 열차가 '빠~앙'하고 들어온다.
은주를 돌아보는 성현.
성현소리>
내가 그렇게 낯설어요?
은주, 성현이 앉아 있던, 남자의 옆자리에 앉으며,
은주 지훈씨! 오래 기다렸지?
돌아 본 채로 굳은 듯 서 있는 성현.
은주는 지훈의 팔짱을 끼고, 서서히 멈추는 열차 앞으로 다가간다.
성현소리>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출입구 문이 열리고, 무심히 성현 쪽을 한 번 돌아보는 은주.
두 눈이 마주치지만 은주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성현 소리>
그렇게 바라보면 용기를 낼 수 없쟎아요.
은주, 지훈과 다정히 지하철을 탄다.
홀로 남겨진 성현.
 
#95.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몇 번이나 전화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은주. 마루를 왔다 갔다.
다시 전화기를 들어보다가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엎드린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으아아아아아----------------ㄱ!!"
한동안 그대로 있는 은주.
벌떡 일어난다. 은주 옆에서 떨고있는 콜라를 바라본다. 복잡한 표정의 은주.
한동안 그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전화기 앞에 앉는 은주.
심호흡을 한번하고, 전화기를 든다.
띡띡띡...
조심스럽게 귀에 수화기를 대어 보면 지훈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훈소리(o.s.) 명륜동입니다.
급하게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가리는 은주.
지훈소리(o.s.)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은주 (수화기를 가린 채 은주가 조용히 나직인다.)
...지훈씨!
지훈 은.. 주니?
놀란 은주, 전화기 후크를 누른다.
전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96. INT. POEM 작업실 - 1998년 - NIGHT
성현이 작업대에 앉아서 설계도 더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초췌한 모습의 성현.
성현 옆으로 놓인 와인 병에 와인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남은 와인을 마저 마셔 버리는 성현.
책상 한 쪽에 놓여진 은주의 편지들과 털 귀마개를 바라본다.
마음을 잡으려는 듯 제도대 위에 놓인 설계 도면들을 뒤적거리는 성현.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펜을 들고 도면에 이리저리 선을 그어 고치는 성현.
속도를 내어 펜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춘다.
도면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도면들을 뒤집어 덮어 버린다.
의자에 기대서 눈을 감는 성현.
 
#97. INT. 은주집 - 2000년 - NIGHT
가스불 위에 올려져 있는 주전자.
은주, 콜라 밥그릇에 먹을 것을 담아 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정리가 안된 은주의 표정. 창문 앞에 서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본다.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 식탁에 앉는 은주. 멍하니 과일을 깎는다.
갑자기 "삐~~~익"하는 주전자 소리. 칼에 손을 벤다. 놀라는 은주.
아파하면서 손가락을 잡는데. 문 밖에서는 "딩동!"
주전자를 끄고 바쁘게 현관 쪽으로 나가는 은주.
문을 열자 놀라는 은주의 표정.
시간경과
조용한 은주집 실내.
은주의 손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있는 지훈. 은주는 멍하니 지훈을 바라본다.
지훈 (손을 잘 감싸며)
으이그~~ 조심하지. 안 아퍼?
은주 괜찮아.
지훈 (은주 옆에 앉으며) 잘 지냈니?
은주 으....응.
지훈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은주 (무지하게 복잡한 표정) ......
지훈 (은주 얼굴을 들여다보며)
왜 전화.. 그냥 끊었니?
은주 (자리를 일어나며) 커피 마실까?
은주의 팔목을 잡는 지훈.
지훈 아냐, 앉아 봐.
은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멈춰 서 있다.
지훈 (은주를 잡은 채) 나.. 원망 많이 했지?
은주, 엄청 커지는 눈. 숨을 가다듬는다.
은주 지훈씨...(마음을 가다듬고) 결혼 준비하느라...바쁘겠지..
지훈 (긁적긁적) ... 알고 있었구나.
잡았던 손을 가만히 푸는 지훈.
은주 ....
지훈 (은주 얼굴을 들여다보며) 결혼..... 그렇지...
막상 결혼하려니까 니 생각 많이 나더라구.
사실 나.. 결혼, 다시 생각하던 중이었어.
은주 (머뭇머뭇)
어.... 잠깐, 잠깐만...
(숨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나.....지훈씨 떠나고... 굉장히 오랫동안 힘들어했었어.
지훈 ..... 그래... 미안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은주...야....
은주 ........미안해.
지훈 뭐가....
은주 (무슨 말을 막 하려고..) 음...
지훈 은주야....
지훈, 마치 은주의 손을 잡으려는 듯 은주에게 손을 내민다.
은주, 외면하고 돌아서는데, 책상 위에 있는 성현에게 선물 받은 장갑이 보인다.
은주, 책상으로 다가가 장갑을 가만히 만진다.
은주 (작은 소리로)
나 지금 꼭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게 있어...
(담담히) 미안한데......
(모기 만한 소리로) 돌아가 줄래.....
........(어색하게) 반가웠어....
은주가 고개를 돌린다. 조금은 황당한 듯 그냥 씨-익 웃는 지훈.
다시 뒤돌아 서는 은주.
은주 한숨을 길게 내 쉰다. 복잡함의 극치에 다다른 표정.
 
#98. INT. POEM 작업실 - 1998년 - NIGHT
조용한 작업실 내에 노란 전등만이 밝혀져 있다. 제도대 위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열려진 한쪽 서랍에 은주의 편지와 털 귀마개 등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드르륵 닫히는 서랍.
한쪽에서 깨끗한 새 제도 용지를 꺼내 제도대 위에 펼치며 제도대에 앉는 성현.
성현소리>
제가 도와드릴께요.
그렇게 힘들었다면 일찍 이야기하지 그랬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제도 자를 능숙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려지는 투시도.
쌓여 가는 도면들. 평면도, 측면도...
성현의 컴퓨터 화면 속에 떠오르는 時越愛의 형태.
성현의 소리>
은주씨 첫 번째 편지 기억하세요?
POEM에서 행운이 가득하길 빈다구요.
은주씨를 알게 된 것이 저에겐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성현 뒷편에 놓인 창으로 이른 새벽 아침이 보인다.
 
#99. EXT. POEM 앞 - 1998년 - 이른 새벽
POEM 현관을 나서는 성현.
성현 소리>
이번에는 제가 빌어드릴께요.
당신의 사랑에 행운이 가득하길 빕니다.
우편함 앞에 서서 우편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담배를 꺼내 문다.
후~~우 길게 내뿜어지는 하얀 연기.
수염으로 지저분한 성현의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100. INT. 은주집 - 2000년 - 새벽
창 밖으로 새벽 기운이 스며드는 은주의 방.
머리끝까지 덮여있는 은주의 이불. 확 걷어내는 은주.
머리는 온통 엉클어졌지만 눈은 말똥말똥. 벌떡 일어나는 은주.
화장대 위에 있던 편지함을 꺼낸다.
편지함을 뒤집어 성현의 편지들을 수북히 쏟아놓고 뒤적이기 시작한다.
#101. INT. 복덕방 - 2000년 - DAY
복덕방 아저씨, 탁상 시계가 고장이 났는지, 시계를 책상 위에 마구 분해해 놓고
다시 조립을 하고 있다.
문이 끼익 열리며 은주가 들어선다.
은주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저씨, 시계를 고치는데 열중하여 은주를 힐끔 보고 그냥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은주 (아저씨 눈치를 살피며) 저기요. 아저씨...
이전에 poem에 살던 사람이요. 저 살기 전 에요...
어디로 이사간지 혹시 아세요?
아저씨 (손을 멈추고 은주를 바라보며)
왜 이제 와서야 그걸 물어?
은주 네?
다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고치는데 열중하는 아저씨, 뭐라고 뭐라고 혼자 궁시렁거린다.
은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어정쩡 주저하며 서 있다.
아저씨 (갑자기 고개를 확 돌려 은주를 보며) 그 때, 그 때 그러니깐,
그 친구는 오지도 않고 이모라는 분이 다 정리하고 갔어.
은주 왜요?
아저씨 (귀찮다는 듯이) 몰라.
이모님이 짐꾼 몇 명 데리고 와서 다 실어 가더라구.
은주 (좀 집요하다 싶게)
그래요? 아저씨, 그럼 연락처는 혹시 모르세요?
대답 없이 은주를 빤히 쳐다보는 복덕방 아저씨. 은주의 간곡한 표정.
잠시 후 아저씨,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알겠다는 듯이,
아저씨 이모님 연락처는 어디 남겨져 있을 텐데...
뒤적뒤적 옛날 서류를 뒤지는 아저씨. 반가운 표정의 은주.
 
#102. EXT. 캠퍼스 - 2000년 - DAY
낯선 곳에 들어선 듯 어색한 은주.
AUDIO>
전화를 누르는 소리가 삑삑 들리고, "이 전화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안내도를 발견하고, 건축과 건물을 찾는다.
 
#103. INT. 과 사무실 - 2000년 - DAY
과사무실 문이 보인다. 똑똑!
조교(O.S.) 네.
문이 열리고, 은주가 들어서서 꾸벅 인사를 한다.
은주 저.. 뭐 좀 여쭤 볼께요.
조교, 무심히 쳐다본다.
은주가 얘기를 꺼내려는 순간, 눈길이 벽면으로 멈춘다. 천천히 다가가는 은주.
조교 무슨 일로....
조교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가까이 가보는 은주.
완성되어 색까지 다 입혀진 아름다운 집 한 채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하단에 98. 3. 時越愛 라고 쓰여 있다.
한동안 그림 앞에 멈춰서 있는 은주.
움직이지도 않고 멍하니 있다.
재혁 소리>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설계한 집이거든요....
은주의 눈이 촉촉해 지고 있다.
재혁(O.S.) 저... 혹시...
은주, 뒤돌아 돌아보면, 재혁이 서 있다.
 
#104. INT. 택시 - 2000년 - DAY
도로 위를 달리는 택시.
그 안에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은주.
재혁소리>
교통 사고였어요...
은주소리>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지훈씨를 떠나보내지 않게 날 도와줘요.
재혁 소리>
대학로에서 누굴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정신을 번쩍 차리는 은주.
은주 (너무나 다급하게)
아저씨 좀 빨리 가실 수 있으세요?
기사 네... 지금 가고 있...
은주 (말 자르며)
빨리요.. 아저씨..(소리를 지르며) 빨리!!!
기사 (은주를 힐끗 보며)
예...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달리는 택시.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종이를 꺼내 편지를 써 내려가는 은주.
 
#105. EXT. POEM 앞 - 2000년 - DAY → 해질 녘
택시가 서고, 은주가 급하게 내려서 POEM을 바라본다.
편지를 움켜쥐고 우편함 쪽으로 달려가는 은주.
택시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은주가 돌아서서 택시를 향해 힘껏 달려온다.
택시를 마구 두드리는 은주. 쾅쾅쾅!
은주 아저씨~~
택시가 끼익~ 선다. 창으로 얼굴을 내민 은주가 다급해 보인다.
택시 기사의 두려운 얼굴 표정.
기사 왜~ 그~래요?
은주 아저씨 봉투 있어요? 아무 거라도 좋아요.
기사 봉투요? 이거밖에 없는데...
주섬주섬 박스를 뒤지던 기사.
누런 봉투를 꺼낸다. 월급봉투인지. 그 안에서 만 원짜리 지폐들을 꺼낸다.
인사도 없이, 낚아채듯 봉투를 받는 은주.
얼른 차를 움직이는 기사. 먼지를 내며 멀어져 가는 택시.
우편함으로 달려가는 은주.
우편함을 조심스럽게 열고 편지를 넣는다.
입구를 살며시 닫고 나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숨이 고르지 않은 초조한 표정이다.
은주 제발 빨리. 제발!!
숨까지 멈추고 있는 듯 한참을 그렇게 있는 은주. 천천히 우편함 입구에 손을 대본다.
편지가 갔을까? 열어보기가 두렵다. 몇 번을 망설이지만 결국 입구를 못 열어본다.
우편함 옆에 그대로 무너지듯 앉아 버리는 은주.
초조함을 달래려는 듯 눈을 꼭 감는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가만히 손을 모아 쥔다.
은주 (중얼거리듯, 대사가 가의 들리지 않는다)
제발... 제발 빨리.
편지가 빨리 가야돼요.
제발... 제발... 성현씨가 이 편지를 받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은 듯,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은주. 울음이 복받쳐 흐른다)
성현씨, 거기 가면 안돼요.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편지가 늦지 않게 해 주세요...
빨리... 제발... 빨리...
시간 경과 (해질 녘)
중얼거리는 은주의 입술. 흐느껴 울진 않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
한참을 운 것처럼 눈이 퉁퉁 부어 있고, 눈물이 멈춰지지 않는다.
이젠 기도도 멈추고, 한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힘없이 일어서는 은주.
우편함에 가만히 손을 얹어본다. 그저 잠시 간절한 마음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본다.
발길을 돌리는 은주.
은주소리>
가면 안돼요. 거기 가지 말아요.
몇 발짝 옮기다 안타깝게 뒤를 돌아본다. 다시 우편함을 바라보는 은주.
다시 돌아서서 우편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
은주소리>
죽으면 안돼요. 성현씨. 미안해요.
점점 멀어지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은주.
이제 저만치 멀어진 은주의 뒷모습. 우편함 주위로 휘리릭 나뭇잎들이 날린다.
신비로운 느낌의 바람이 우편함을 감싼다. 길지 않게...
 
#106. INT. POEM 침실 - 1998년 - 아침
고요한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새소리라도 들릴 듯 평화로운 느낌이다.
한쪽에서 時越愛 그림과 도면들을 정성스럽게 정리하는 성현의 손길.
그림을 다시 꺼내 가만히 바라본다.
건축과 사무실에 걸려 있던, 아름답게 완성된 時越愛의 그림을 가장 첫 장에 두면서
가만히 스케치북을 덮는 성현.
창을 열고 창 밖을 내다보는 성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우편함에 시선을 둔다.
 
#107. INT. 은주집 - 2000년 - 아침
은주가 침대에 엎드려 있다. 밤을 새운 듯 부스스하다.
성현의 목소리>
오늘은 전철 안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가세요.
하긴 또 잃어버리면 제가 찾아드리면 되죠 뭐.
쭈~욱 뻗어진 은주의 팔. 한 손에는 성현이 찾아주었던 녹음기가 힘없이 쥐어져 있다.
위~~~~~~~~~~~~이~~~잉~~~
한참을 플레이되는 녹음기.
tape이 다음 면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또깍!
성현의 목소리>
오늘 은주씨를 보고 나니 참 묘한 기분이더군요.
은주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는다.
성현의 목소리>
갑자기 2년 뒤의 제 모습에 대해 궁금해 졌어요.
넋이 나간 표정의 은주.
성현의 목소리>
2년이 지난 뒤에도 은주씨 주변에 제가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은주.
성현의 목소리>
우리는 만나질 인연은 아닌 가봐요?
위~~~~잉~~~~
눈을 꼭 감는 은주.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은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울먹이며)
가면..... 안돼요.....
FADE OUT.
 
#108. INT. 대학로(은주의 회상) - 1998년 - DAY
FADE IN.
창가에 앉아있는 은주와 지훈. 침울한 표정의 은주를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지훈.
지훈 은주야. 기운 내.
은주 ...
INSERT. 거리에서 카페 쪽으로 다가가는 성현의 뒷모습.
지훈 나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건데, 이렇게 무겁게 하기야?
은주 지훈씨... 기분이 이상해.
지훈 왜 그래? 겨우 3년인데 뭐
은주와 지훈이 앉아있는 창문 밖으로 성현이 Frame In 되어 나타난다.
은주 이상하단 말야. 불안해 모든 것이~
카페 쪽으로 다가서는 성현. '끼~~~익!' 순간 성현의 몸이 허공에서 Frame Out되어 버린다.
은주와 지훈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109. EXT. 카페 앞 길 (회상 계속) - 1998년 - DAY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어, 군중을 이룬다.
심하게 다친 성현이다. 머리를 다쳐 얼굴이 엉망으로 피투성이이다.
이제 막 죽을 것 같은 모습의 성현. 주변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성현이 힘겹게 고개를 움직인다.
카페 안의 은주를 향하는 성현의 눈빛.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성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러나 카페 안에서 성현을 바라보는 은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FADE OUT 길게....
은주소리>
가지 말아요. 성현씨. 제발 부탁이예요.
사랑해요.
 
#110. EXT. POEM 앞 - 2000년 - DAY (3시경)
FADE IN.
(#1과 같은 장면)
현관문을 열고, 커다란 짐을 잔뜩 끌어안은 여자가 걸어나온다.
한 발로는 문을 지탱하고, 조심스럽게 돌아서는 정숙. 얼굴이 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111. INT. POEM 거실 - 2000년 - DAY
은주, 거실 탁자 위에 있던 편지지를 접으려다가 다시 펼쳐 몇 자 더 적는다.
편지를 가방에 넣는 은주. 콜라를 품에 안고, 집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깨끗한 욕실도 확인하고, 여기저기 둘러본다.
휑한 거실에 소파만 남아있다. 가만히 다가가서 소파의 흠을 만져보는 은주.
(#91에서 콜라가 물어뜯은 자국)
은주 (옆에 있던 콜라를 바라보며) 니가 그랬니?
콜라는 마치 지가 그랬다는 듯한 표정으로 은주를 바라본다.
그 때 밖에서 부릉거리는 용달소리와 눈이 내릴 거 같으니 빨리 가자는 운전기사의 재촉소리, 어서 나오라는 정숙이의 큰소리가 들리면,
은주 (밖에 대고 외치며) 네, 갈께요.
못내 아쉬운 듯 방 불을 모두 끄고, 집을 나서는 은주.
 
#112. EXT. POEM 앞 - 2000년 - DAY
은주,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손에는 책들을 잔뜩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나온다.
입에는 카드봉투를 물고 있다.
은주를 쫓아 나오는 까만 강아지 한 마리.
집 앞 우편함 앞에 서는 은주. 카드를 입에 문 채 어떻게 넣어야 할지 난감해 한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이 유난히도 상쾌하게 느껴진 은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기분 좋은 표정의 은주. 옆에서 강아지도 폴짝폴짝 뛴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는 은주.
갑자기 콜라가 왈왈 짖는다. 한 눈을 파는 사이 어디론가 달려 가버리는 콜라.
은주는 어리둥절 콜라를 부르려고 하다가, 입에 문 카드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콜라가 포엠 앞에서 누군가를 반갑게 맞아들이고 있다.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은주. 의아하다.
콜라와 함께 은주에게로 다가오는 사람은, 성현이다.
콜라, 폴짝폴짝 뛰며 좋아한다.
성현, 우편함 앞으로 다가와 서며, 은주가 떨어뜨린 카드를 집어 들고 은주에게 건넨다.
쑥스럽게 웃는 얼굴이 환하게 보인다.
은주, 카드를 받으며 살짝 미소. 누굴까 하는 표정.
잠시 어색한 두 사람.
성현, 머뭇머뭇 주머니에서 은주에게 봉투 하나를 내민다.
누런 봉투 겉봉. <(주)대상운수 박상기 기사 ₩500,000>라고 적혀있는 위에 볼펜으로 몇 줄 그어 지워져 있고, <한성현>이라고 고쳐 쓴
은주의 글씨(급하게 쓴 듯 마구 날려져 있는 글씨).
성현 (쑥스럽게)
지금부터 ...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할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
의아해 하는 은주.
성현과 은주의 얼굴에 눈이 한 두 송이씩 떨어진다.
성현과 은주 주변을 도는 카메라. 성현 목소리가 main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간간이 들려온다.
약간은 어색하게 이야기하는 성현. 호기심에 가득 차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은주.
카메라가 점점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ending credit이 올라간다.
조금씩 떨어지던 눈발이 점점 커지면서 함박눈이 되고 있다.
정숙소리(o.s.) 은주야--- 아저씨 열 받았다. 빨리 와!
아랑곳 않고 이야기하는 두 사람.
은주가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밝게 웃는 모습이 보이고 성현, 함께 웃고 있다.
용달기사가 울리는 클락션 소리.
이젠 카메라가 제법 멀리 빠져 화면에 두 사람이 작게 보인다.
두 사람의 주변에서 깡총깡총 뛰어 다니는 콜라. 계속 이야기하는 두 사람.
어디선가 라디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캐롤이 끝나면서 DJ 소리 이어진다.
DJ소리>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은 만큼 오프닝 곡을 빙크로스비의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로 준비했습니다.
다가오는 1999년 12월 25일! 날씨. 눈 펑펑. 아주 큰 눈이 예상된다고 하네요. 오랜만에 예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할 수 있겠어요.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에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죠. 누구나 한번쯤은 기대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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